22 그 예언자가 다시 이스라엘 왕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힘을 키우시고,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두십시오. 내년에 시리아 임금이 다시 임금님을 치려고 올라올 것입니다.”
23 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자기들의 왕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입니다. 저번에는 산에서 싸웠으므로, 우리가 졌습니다. 그러나 평지에서 싸우면, 우리가 그들을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지방 영주를 모두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대신에 군사령관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십시오.
25 잃은 수만큼, 군대와 기마와 병거를 보충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평지에서 싸우면, 틀림없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왕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다.
하나님의 조언과 시리아 왕의 신하들의 조언이 충돌한다. 하나님은 시리아가 다시 치러 올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대비 태세를 단단히 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시리아 왕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 함으로써 전쟁을 준비한다. 시리아 신하들은 하나님이 ‘산의 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조건’에 따라 제한되는 분이라고 착각한다. 하나님은 온세계 만물을 지으신 분이신데도, 그들의 인식은 하나님을 좁은 지형에 묶어 인식할 뿐이다.
그런 인식은 아직도 그들 속에 ‘자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재로 시리아의 전차와 군마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고 물량으로 전쟁의 판세가 바뀌는 것은 ‘평지’였을 때이다.
시리아의 신하들의 조언은 꽤나 정확한 편인데, 지방 영주들보다 군 사령관들을 둠으로써 전쟁 양상에 대한 정확한 대응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지방 영주들의 업적이 자연스럽게 제한됨으로써 왕권 강화를 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확한 책략이고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하나님이 ‘산의 신’이 아니시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하나님이시다.
26 해가 바뀌었다. 벤하닷은 시리아 군대를 소집하고,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아벡으로 올라갔다.
27 이스라엘 군대도 소집이 되어서, 식량을 배급받고는, 그들과 싸우려고 나아갔다. 이스라엘 군대가 그들 앞에 진을 쳤으나, 이스라엘 군대는 시리아 군대에 비하면, 마치 작은 염소 두 떼와 같았고, 시리아 군대는 그 땅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다.
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리아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산의 신이지, 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하니, 내가 이 큰 군대를 모두 네 손에 내주겠다. 이제 너희는 곧,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
29 양쪽 군대는 서로 대치하여서, 이레 동안 진을 치고 있었다. 드디어 이레째 되는 날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시리아 군대를 쳐서 하루만에 보병 십만 명을 무찔렀다.
전쟁의 양상 자체는 압도적인 물량공세로 시리아 군의 강력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 왕에게 시리아 사람들의 말, ‘산의 신’에 대한 반론을 직접 하시겠다고 하심으로써 이 전쟁의 목적, 하나님이 참된 ‘주인’ 이심을 알게 만드시겠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아합이 ‘이스라엘 왕’으로 지칭되다가 갑자기 ‘아합’으로 바뀌는 순간을 잘 포착해보면 좋겠다. 아직 아합은 이스라엘 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합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를 아합이 스스로 비틀어 버린다. 이로써 자신 스스로의 비극적 결말을 앞당긴다.
30 그 나머지는 아벡 성으로 도망하였으나, 성벽이 무너져서, 나머지 이만 칠천 명을 덮쳐 버렸다. 벤하닷도 도망하여서, 그 성 안의 어느 골방으로 들어갔다.
3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왕가의 왕들은 모두 인정이 많은 왕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목에 줄을 동여 매고, 이스라엘 왕에게 가면, 어쩌면 그가 임금님의 생명을 살려 줄지도 모릅니다.”
32 그래서 그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목에 줄을 동여 매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가서 “왕의 종 벤하닷이,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니, 아합 왕이 말하였다. “아직도 그가 살아 있느냐? 그는 나의 형제다.”
벤하닷은 아벡 성 안의 어느 골방으로 피신해 들어간다. 전쟁은 완전히 시리아의 패배로 끝났다. 신하들은 최후의 가능성, 이스라엘 왕이 인정을 베풀어 줄 것을 두고 최대한 가련한 모습으로 투항하자고 말한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 장면에서 거꾸로 이스라엘이 주인이되고 시리아가 종이 되는 형국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금 아합을 부르는 호칭이 바뀐다.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 아합이다. 시리아 왕을 살려주고 형제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판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이것은 매우 탁월한 정치적인 판단일 수도 있었다.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더 나은 경제적, 군사적 판단일 수 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시리아를 멸망시키실 수도 있었다. 인간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33 그들은 이것을 좋은 징조로 여기고, 얼른 말을 받아서 대답하였다. “예, 벤하닷은 임금님의 형제입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가서 그를 데려오너라.” 벤하닷이 아합 왕에게 나아오니, 왕은 그를 자기 병거에 올라타게 하였다.
34 벤하닷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나의 부친이 왕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 안에 상업 중심지인 광장을 만든 것 같이, 임금님께서도 손수 다마스쿠스 안에 그러한 광장들을 만드십시오.” 그러자 아합은 “그러면 나는 그런 조약을 조건으로 하고, 당신을 보내드리겠소” 하고 말한 뒤에, 그와 조약을 맺고서, 벤하닷을 놓아 주었다.
아합은 ‘조약’을 맺는다. 그가 하나님과의 조약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아합이 조약을 맺고 벤하닷을 풀어놓는 장면은 매우 역설적이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조약, 이스라엘의 참된 주인이신분과 맺은 언약은 무시하면서 자기가 맺은 언약에 신실하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 눈 앞에 보이는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인간 왕의 최선의 선택들은 매우 이기적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 섬기지만 결코 더 나아간 믿음의 결단과 헌신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언약은 파기한채 눈 앞에 보이는 인간군상들과의 언약에 더 무게를 둔다.
우리의 선택들은 어떤가? 하나님만이 우선시되는가? 아니면 우리 삶에 이득이 될 것들에만 우선시되는가? 우리 삶에 최우선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에 신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생각을 넘어서 일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줄 믿는다. 우리의 가장 좋은 것보다,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