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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변화와 종말 / 마가복음 9:2–13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엿새뒤 라는 말과 높은 산은 출애굽의 이미지를 공유하려는 목적일 수 있다. 출애굽기 24장 16절은 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덮었다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 전반에서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이미지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마가가 ‘엿새’라는 기간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과 ‘높은 산’은 출애굽기 내용을 떠오르게 만든다.
‘변하다’ 라는 단어는 형태가 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변함]은 ‘의복’이 변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계를 짓기는 어려워보인다. 왜냐하면 3절에서 옷이 빛났다는 표현이 보충 설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변화는 예수님 자체에 대한 변화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묘사와 연결되어 생각해볼 수 있다.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하얗게 빛나는 옷은 다니엘 7:9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 다른 묵시문헌들에서도 밝게 빛나는 옷은 천상적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빛나는 옷은 앞으로 ‘부활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빨래꾼이라도 희게 할 수 없다는 표현은 아마 어떤 자연적 표현으로도 목격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왜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가장 의미있는 해석은 모세와 엘리야가 ‘종말’과 관련된 인물로 에녹과 함께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일부 유대 사상에서는 ‘죽음을 보지 않은 자들’로써 모세, 엘리야, 에녹이 언급된다. 이런 언급을 통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올 것이라는 암시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들이 ‘죽음을 보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5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6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초막’을 짓겠다 라는 말 또한 출애굽기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 베드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황홀하고 놀라운 경험이 말문을 막히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겁에 질렸다’ 라고 설명된다. 마가복음을 관통하는 표현 중에 하나가 ‘두려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경험할때마다 ‘두려움’을 동시에 경험한다.
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의 세례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된다. ‘구름’ 또한 시내산에서 중요한 이미지 중의 하나였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과 십계명이 선언되는 장면, 신명기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나와 같은 예언자’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의 성취가 연결되어 보인다.
예수님의 모습이 언제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미 환상적 사건이 끝난 것으로 보여진다.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이 꼭대기에서의 사건이 지속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이 놀라운 경험이 제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서로 물었다.
변화 사건이 ‘부활’과 연결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부활은 계속해서 선명히 예고되고 있다. 여기에 ‘인자’ 라는 표현은 앞선 다니엘 7장의 흰옷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며, 종말의 사건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점도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서로 질문한다. 아직 그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의 격차는 매우 크다. 예수님은 ‘인자’로써 고난 받으실 것이고, 고난 중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11 그들이 예수께 묻기를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하니,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찌 된 일이냐?
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그를 두고 기록한 대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는 말씀은 말라기에서 등장하고,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 이미 지적된 것이었다. 예수님 또한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의 말처럼 이미 묵시문학에서 엘리야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여러차례 암시되고 있었다. 이것과 산 위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종말’의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이제 시간이 되었고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
예수님의 변화 사건과 부활의 예고 사건은 ‘종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종말’, 하나님의 때의 궁극적인 형태는 십자가에서 모든 예고된 율법이 성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성취된 율법이 ‘부활’로 인증됨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완성의 순간까지 ‘부활’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시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종말, 완성된 말씀의 순간들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완성된 말씀,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 부활에 참여한 삶만이 참된 의미를 되찾는 삶이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이 부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완성된 부활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삶을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