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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그리스도인의 균형 / 사도행전 18:24–19: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24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25 그는 이미 주님의 ‘도’ 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간 이후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기 전까지 에베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준다. 그곳에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아볼로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 관해서 열심히, 정확하게 가르치기는 했지만,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다라고 증언한다.
여기에서 의아한점은 그가 정확하게 성경에 능통하고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가르치는 은사로 선교 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열심히’라는 말은 원어에서 [성령을 힘입어 열심히] 라고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요한의 세례가 가지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요한의 세례는 분명히 ‘회개와 죄사함’에 대한 세례이다. 그러나 요한은 앞으로 오시는 분께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었다. 따라서 ‘세례’가 단순히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또는 물을 뿌리는 방식의 것을 넘어서 이 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 곧 죽으심, 부활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회개와 죄 사함은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과 성령’은 정화된 삶을 통해, 성령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통해서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아볼로는 이미 불과 성령을 얻은 ‘삶’으로써 말씀도 정확히 가르치고 선교 사역도 탁월하게 하지만, 이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로부터 얻게된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서 부족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하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서, 따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 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27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신도들이 그를 격려하고, 그 쪽 제자들에게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거기에 이르러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공중 앞에서 유대 사람들을 힘있게 논박했기 때문이다.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바울이 다녀간 적이 있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두 부부는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볼로에게 부족했던 세례에 대한 이해와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도록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에베소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지식’적이고 ‘이론적’인 부활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지적인 크리스찬’들이다.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런 측면에서도 분명히 아볼로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 싶어했다. 그곳의 수도는 고린도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 교회 분열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볼로 파’다. 그렇다면 아볼로 파는 아볼로의 ‘이론적인 기독교’에 매료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어쨌든 아볼로가 그곳의 신자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의 성경 강해는 탁월했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고 힘있게 증명해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부터 전달받은 더욱 분명한 하나님의 도를 통해 ‘성령’님의 임재를 분명히 나눳을 것이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이야기는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사역하기 시작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바울은 그곳에서 어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질문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성령’의 존재 조차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조우한 이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채 스스로를 ‘제자’라고 인식하고 있는 ‘유사한 그리스도인’ 임을 간파했다는 말일 수 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인 일 수 있으나 ‘참된 변화와 성령의 열매’를 경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질문하는데, 앞서서 아볼로의 경우처럼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세례의 표면적 의미인 ‘정결의식’ 정도로 경험한 것에서 그친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일 수 있지만, 참된 변화와 은혜에 완전히 사로잡힌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아직’ 되지 못했다.
4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5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참된 회개의 세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성령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방언과 예언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반드시 일반화해야 하는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늘 본문에서 방언과 예언을 경험하는 사람이 ‘열두 사람쯤’ 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이것은 마치 부활의 주님을 알았던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강림을 경험하듯이, 이론적 그리스도인에 머물렀던 이들이 ‘성령 임재’의 기준점인 [오순절 강림사건]을 유사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로써 에베소가 복음의 또 다른 전초기지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지적 그리스도인’과 ‘감정적 그리스도인’의 경계선을 발견하는 듯 하다. 우리는 ‘지적 그리스도인’이 완벽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점을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완전히 이론적으로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설명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재적인 ‘성령님의 임재 경험’ 속에 있지 않는다면 여전히 ‘유사한 그리스도인’에 머무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반대로 만약 ‘성령의 은사’만을 강조하고 은사의 차별과 위계를 만들려는 위험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들은 ‘은사’가 [사랑] 속에서 행해져야 하며, 그 위대한 사랑의 완성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성경적 근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해 방향성 없는 열광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이성주의자도, 감정주의자도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균형 속에 있어야 건강하고 탁월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말씀을 제대로 알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실재적인 ‘성령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균형 속에 참된 부흥의 시작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 말씀 묵상하며 그 균형잡힌 신앙인이 되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