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5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예수님에대한 소문을 헤롯이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엿볼수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부활했는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등은 설명될 수 없다. 아마도 부활했다는 개념은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것처럼 영의 능력이 옮겨오는 방식을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엘리야다!’ 라고 말하고,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 같다 라는 표현들도 모두 과거의 유명한 예언자들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다른 누군가가 되실 수 없다. 예수님의 사역의 독특성은 다른 예언자들과 공유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가 얼마나 한계성을 가지고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16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
17 헤롯은 요한을 잡아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헤롯이 자기와 형제간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18 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헤롯은 소문을 듣고 곧바로 세례 요한을 떠올렸다. 헤롯에게 요한은 매우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고독한 소리였음과 동시에 현실 세계에 매우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감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근친혼이 얼마나 팽배하고 일반적이었는가를 언급하는 것과 상관없이 근친혼 자체, 특히나 형제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도덕적 거부감은 명백하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선포해왔다. 따라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이스라엘의 왕은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로인해서 원한을 품은 것은 오히려 헤롯이 아니라, 그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였다. 그녀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헤롯이 요한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최소한의 두려움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두려움이 신앙적 차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혼란스럽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견지할 뿐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23 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이라 불리는 인물의 아들이다.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에 인질처럼 잡혀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문물과 문명을 아주 잘 알고 습득할 수 있엇다. 따라서 본문의 이야기는 로마 문화와 떼어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어쨌든 안티파스는 매우 퇴폐적인 연회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것은 로마의 문화를 수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 즐거움이 어떤 방법이었을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본문에서 ‘딸’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대략 12살 이상의 아이들에게 사용되는데 그런 어린 아이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미 궁중 앞투와 정치를 이해하고 있는 인물로 생각해본다면 ‘즐겁게’ 만드는 기쁨은 단지 아이드르이 ‘재롱찬치’ 수준에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퇴폐적인 음란한 행위가 수반되는 춤이었을 것이고 이것으로 헤롯의 선을 넘는 약속들이 이해가 된다. 그는 정상적 판단을 할 수 없을만큼 취했을 것이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후회할만한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다.
24 소녀가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25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청하였다.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녀는 어머니에게 가서 요청할 사항을 지시받는다. 이것은 마치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궁중의 권력다툼과 암투는 아내인 헤로디아로부터 꾸며지고 진행된다. 잔혹한 명령이 내려졌다. 왕이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지만, 결국 헤롯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했다. 평판과 능력과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는 마음을 괴로울지라도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
27 그래서 왕은 곧 호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호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28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하였다.
요한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모욕적인 ‘전시됨’을 통해 몇몇 사람에게 충격적이고 잔혹한 볼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무덤에 안장’ 하는 부분만 생각해보자. 요한에게도 제자가 있었고, 무덤이 존재했고, 쉼을 기원하며 안장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전시된 죽음’이었고 모욕적이고 잔혹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리고 무덤에 안장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과 다르게 모욕적이고 전시적이었던 죽음은 새로운 의미에서 ‘전시’ 되었다. 그것은 곧 ‘부활’이었으며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고도 남을 영광스러운 결과였다.
세례요한은 일종의 그림자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역을 하시기 전 필요한 불씨같은 존재였다. 그가 간접적으로 연결된 당한 죽음의 모욕과 비참을 예수님께서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생명가운데 부활하셔서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승리로 바꾸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예시는 어떤 위대한 신앙적 위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그 시대적 사명과 사회 문화 배경 속에서 행동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대를 초월하시고 인류 문명사를 초월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 현재 미래를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십자가와 하나가 되는 일부터 이뤄져야 하는 줄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 참된 부활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구하고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