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2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드디어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 보게 하였다.
3 그들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나서,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가면서, 이방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곳의 모든 신도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갈라디아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해낸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 뒤에 교회 안에생겨난 구원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나오게 된다. 핵심은 ‘모세의 관례’, 율법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율법’과 관례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언약은 폐기 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상당한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 ‘사도들과 장로들’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중요한 이유는 이미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증거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는데도 율법규정에 대한 강조로 인해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갈라디아서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오늘 본문 이전에 베드로와 바나바조차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주장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의 자리를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피했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외식’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냥 단순히 ‘교제’를 위한 식사 자리였다면 이정도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식사’는 [성찬]이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성찬은 우리 주님의 몸과 하나되고 교회는 한 몸으로써 연합하는 일인데, 그 성찬을 거부하고 따로 드리려고 했다는 말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분리를 시도하려고 했다는 것, 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적’인 편입을 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해결해가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의식적 규정들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대체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하지 않고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서 행하는 경건이야말로 전가된 ‘의’가 실행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4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벌어진 성령 임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다 전했을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더욱 전통적인 유대교 관습을 따르고 있던 바리새파였던 신도들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파 신도들의 주장에대해서 바울이 자신의 경험만을 앞세워서 막무가내식으로 설명하려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야말로 최고의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경관, 구원관이 당시의 바리새인 신도들의 논리를 압도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가진 복음에 대한 관점은 ‘성경’을 더욱 깊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예루살렘 멸망 이전이기 때문에 점점 더 민족주의자들의 발언이 힘을 얻던 시기였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더욱 공고하고 강력하게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관점에서 복음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를 만나주셨던 그 사건은 바리새인으로써의 바울을 완전히 깨뜨리는 사건이었다. 또한 동시에 이방인들을 위한 사명을 심어주셨던 사건이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논증을 할 수 있었다.
7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8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고넬료 회심 이후, 우리가 읽고 있는 시간대 이전에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방인들에대한 ‘회피’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바울의 질책이 있었고 베드로는 그에 대해 분명한 뉘우침과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이 회의에서 베드로는 아주 적극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은 누가의 서술 순서에 따라서 고넬료의 경험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이후에도 분명히 이방인들의 변화와 성령임재 경험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이런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셨고, 아무런 차별없이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에게 이론적 경험보다 실재적인 경험이 먼저 일어났던 것을 지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베드로의 발언을 보면 그것을 경험적으로 두지 않고 그것을 말씀 속에서 재확인하고 정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정리한 것을 보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성령을 주셔서 인정하시는 것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어떤 행위나 율법보다, 할례나 정결규례보다 말씀을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주인으로 고백했을 때 경험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참된 자유를 가져다 준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의 율법이 ‘감당할 수 없던 멍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믿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이미 구약에서도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베드로는 적극적으로 주 예수의 은혜가 구원의 핵심이며, 이방인들의 구원에도 주 예수의 은혜가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주 예수의 은혜는 명백히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다. 그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다.
우리도 구원에 대해서 언제나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함정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때 제공받는 선물이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서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해왔다는 것을 볼 때 이 문제의 어려운 지점을 역설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진리를 다시 확인하길 바란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 그 은혜에 복종할 때, 그래서 그 받은 은혜 속에 합당한 삶을 살아낼 때 참된 자유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오늘 그 은혜의 복음을 다시 기억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