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대답하였다.
2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3 네가 혼자서 큰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을 줄 아느냐?
4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5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6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발은 매우 공격적으로 욥을 쏘아붙인다. 욥이 친구들이 틀렸다고 비웃는다고 생각하면서 직접 나서서 훈계와 가르침을 주고 책망하겠다고 나선다. 소발은 욥의 말이 ‘헛소리’ 라고 말하면서 조목조목 욥의 틀림을 지적하려고 한다. 우리가 엘리바스의 경우와 빌닷의 경우에서도 살펴봤지만 소발에게서도 ‘진실’을 발견한다. 친구들은 결코 틀린 신학을 가지고 욥에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친구로써의 ‘헤세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통하는 신학이 없을뿐이다.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랍고 어려운 것인지 이야기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앞으로 소발이 표현하게 될 하나님의 높으신 뜻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들어볼만하다. 하지만 소발 역시 성급하게 이 모든 이야기의 적용을 단순화시킨다. ‘죄’를 지으면 재앙과 ‘징벌’을 받는다의 역, 재앙과 벌을 받는 건 죄 때문이다를 진리로 적용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이 ‘죄보다 가볍다’고 선언해 버린다.
그들은 친구였으면서도 욥이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하나님이 평가하신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판단을 해놓고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사라진 헤세드의 비극이다. 사랑과 자비없는 지식과 신학은 잔인하다.
7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8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어찌 미칠 수 있으며, 스올보다 깊으니 네가 어찌 알 수 있겠느냐?
9 그 길이는 땅 끝까지의 길이보다 길고, 그 넓이는 바다보다 넓다.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의 감동적인 글을 떠올릴 수 있다.
엡 3.18-9
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의 무한함을 한계를 가진 유한한 인간이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그 무한한 한계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따라서 소발의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지적은 옳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 고통에 차 부르짖는 이야기의 핵심이 하나님의 선과 악을 ‘알려달라’ 는 요구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고 해봐야 인간으로써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처럼 욥의 요구는 ‘알아야만한다’가 아니라, ‘대답해달라’ 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욥은 정답이 필요한게 아니라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통한 ‘대화’이다.
10 하나님이 두루 지나다니시며, 죄인마다 쇠고랑을 채우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느냐?
11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지를 분명히 아시고, 악을 보시면 곧바로 분간하신다.
12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
소발에게서 하나님은 악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냉엄하고 날카로운 재판자시다. 잘못과 악을 곧바로 분간하시고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정말 그러하시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역사서와 선지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죄를 끔찍히도 싫어하시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이스라엘을 향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소발은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는 것보다 들나귀가 사람 낳는 것이 쉽다고 말하면서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돌려서 욥의 미련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매우 모욕적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지만 소발의 말이 진실이라도 온유함과 헤세드가 없는 말들은 파괴적이다.
13 네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네 팔을 그분 쪽으로 들고 기도하며,
14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면,
15 너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얼굴을 들 수 있다. 네 마음이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16 괴로운 일을 다 잊게 되고, 그것을 마치 지나간 일처럼 회상하게 될 것이다.
17 네 생활이 한낮보다 더 환해지고, 그 어둠은 아침같이 밝아질 것이다.
18 이제 네게 희망이 생기고, 너는 확신마저 가지게 될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할 것이 없어서, 안심하고 자리에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19 네가 누워서 쉬어도 너를 깨워서 놀라게 할 사람이 없고, 많은 사람이 네게 잘 보이려고 할 것이다.
20 그러나 악한 사람은 눈이 멀어서, 도망 칠 길마저 찾지 못할 것이다. 그의 희망이라고는 다만 마지막 숨을 잘 거두는 일뿐일 것이다.
소발도 다른 친구들의 조언과 마찬가지로 ‘회개’하라고 말한다. 회개하면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두려움 없는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욥의 문제가 죄 이고 죄 때문에 욥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해결책은 ‘회개’다. 회개는 ‘마음을 바르게 먹음’이라는 내면적 변화와 팔을 하나님 쪽으로 들고 기도하는 외면적 변화 모두를 지적하므로 매우 실재적이다. 또한 손을 떼고 집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돌이켜야 할 문제들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총체적 인간으로써의 회개’를 바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회개의 혜택은 드디어 ‘안식’ 하리라는 것이다. 욥이 그토록 바랐던 안식의 시작은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악인들은 욥이 말했던 것처럼 숨을 잘 거둠으로 소멸하는것만 바랄 뿐이다. 따라서 회개해야 한다.
다시 지적하지만 소발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고 총체적 회개에 대한 지적도 매우 올바르다고 본다. 죄에 대한 전적인 회개와 돌이킴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욥의 질문이 더욱 근원적이었다는 점을 소발은 파악하지 못했다. 욥이 죄때문에 벌을 받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다. 욥의 고난은 그런것 때문이 아니었다. 소발은 원리상으로는 정확했지만, 독단적인 적용과 날카로운 신학적 적용이 하나님으로부터 틀렸다 판단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발의 회개에 대한 인식과 적용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감정적’ 돌이킴으로 축소화시킬때가 많지 않은가? 내면적, 외면적, 개인적, 공동체적 변화 모두를 돌이킴으로써 회개를 이뤄야 한다는 소발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회개가 다른 사람들을 날카롭게 제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적용할 때 매우 중요한 체크포인트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는 내면적, 외면적, 개인적, 공동체적 회개를 이뤄야 할 숙제를 받는 셈이다.
오늘 말씀 묵상하면서 이 참된 회개가 날카로운 칼처럼 누군가를 아프고 상처내는데 사용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랑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며, 온전한 회개로 참된 안식과 기쁨이 우리안에 경험되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소발은 ‘회개’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2.
소발의 원리적 설명은 전적으로 옳다.
3.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폭력이 될 수 있다.
4.
사랑으로 회개를 실천하고 전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