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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새로운 시대의 식탁 / 마가복음 2:13–28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닷가로 나가시고 무리는 예수님께로 나아와 가르침을 받는다.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신다. 레위는 ‘세관’에 앉아있다. 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동족을 로마에 팔아 넘기는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죄인’으로 각인 되어있는 그를 예수님은 ‘따라오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당하시게 될 평판의 하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우리가 이전의 장면들에서 열병으로 앓고있는 장모와 나병환자를 직접 손을 대시고 고치시는 장면과 함께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이 예수님께 전염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식탁에서 제공되는 기쁨과 잔치가 그들에게 전달되고 제공되고 있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전 본문들에서 지적한것처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제의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속으로 생각하던 반감은 이제 제자들에게 표현된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는가?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누가 죄인인가?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에 따르면 세리들과 죄인들이 ‘죄인’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참고해본다면 예수님의 기준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들은 없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거절하지만, 그로써 그들은 치유될 가능성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렸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자들은 치유의 가능성을 넘어 기쁨의 식탁을 공유하고 있다.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논란은 금식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용서와 기쁨의 식탁을 제공하시는 것과 대비되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욕’을 선택한다. 금욕적인 행동은 ‘경건’과 ‘거룩’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자신들의 ‘의로움’과 대비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죄인됨’을 강조하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이들을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로, 자신이 ‘신랑’ 되심으로 말씀하신다. 이 식탁은 신랑와 함께 하는 잔치의 식탁이다. 신랑이 제공하는 식탁에서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신랑이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슬픔의 때에 금식이 이뤄질 것이다. 우리는 신랑이 죽음에 빼앗기는 날,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기쁨의 잔치로 변할 것이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제시된다.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기워입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예시 모두 ‘새로운’것이 ‘낡은 것’을 파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것을 완전히 새롭게 대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존의 질서 속으로 새로운 질서가 투입되면 오래된 질서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이전의 치유의 기적들을 함께 생각해보더라도 예수님은 분명 기존 질서에 도전하시며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언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다시 ‘안식’과 ‘식사’가 연결되며 ‘규정’과 ‘의도’가 충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베어먹는 일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예시를 든다. 사무엘상 21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놉에 있을 때 생긴일이다. 사무엘상에는 안식일에 벌어진일이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유추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쨌든 다윗의 이야기를 드심으로써 ‘왕’ 이라는 지위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만드신다. 다만 예외규정들이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의 예시는 ‘왕’이 규정을 범한 것이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처럼 자신도 그러하리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예수님은 ‘다윗 왕’의 수준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다. 이 땅에서야 다윗의 자손이시지만, 그분의 원래 정체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다. 그분이 안식하셨고 안식을 제정하셨고 안식을 누리셨고 안식을 풍성하게 만드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안식의 의도를 정확히 밝히신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생긴것이 아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자신들을 섬길 인간을 찾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따로 인간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에게 역할 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이 명확한 차이 속에서 안식일의 의도 또한 달라진다. 안식일은 신을 ‘섬기는 날’이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들인 사람들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의 주인이심으로 모든 세계를 정당하게 다스리실 분이시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새로운 시대의 식탁을 보게 된다. 그곳은 ‘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초대되며 그곳에서 참된 기쁨과 회복과 안식을 경험한다. 그러나 낡은 구시대의 식탁은 ‘금식’과 ‘금욕’으로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 애써보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방식과 방향성으로 스스로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게 만듦으로, 영원하신 분의 형벌을 받아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대비와 역설이 본문에 가득하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우리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면 좋겠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주시며 기쁨과 축제의 잔치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신다. 그 자리로 나아가 참된 만족 누리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