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들이 이제 예루살렘 가까이에 도착했다. 여정은 예루살렘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여정의 입성부터 메시지를 준비하신다. 그것은 ‘왕’의 입장이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지시하신다. 여기에서 세 가지 정도가 왕적 행동으로 제시될 것이다.
1.
왕은 어떤 동물이라도 징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예수님은 그 권리를 행사하고 계신다.
2.
전통에 따라서 어느 누구도 왕의 탈 것을 탈 수 없다. 즉,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동물의 ‘가장 처음’은 왕이 타야만 한다.
3.
나귀가 매여있다는 묘사는 창세기에서 유다에 대한 야곱의 유언에서 앞으로 올 통치자가 자신의 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유다의 자손으로써 예언된 왕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당연히 나귀를 임의로 끌고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다. 이때 ‘주께서 쓰시려고 하신다’ 라는 말은 마치 암호처럼 사용되어서 나귀를 내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주께서’ 라고 되어 있는 단어가 [퀴리오스] 인데 여기에서의 퀴리오스는 예수님을 지칭한다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직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들이 부족하다. r.t. 프란스에 의하면 이 문장 자체의 원문은 ‘보내다’ 라는 동사의 주어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보내다’를 당연히 예수님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다시 되돌려 보내실 것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셨다 가 되는 것이고 이 행위의 모든 최종 결정권자가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도, 왕으로써 나귀를 취하시는 것도, 예언에 대한 성취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예수님의 예견하셨던 시나리오와 지침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앞서 지적한것처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된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은 일어나야 할 일들, 계획된 일들의 확인이다. 사람들의 ‘가만히 있음’조차도 나귀를 끌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도둑으로 오인한 반대와 저항이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이 인정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도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나귀는 누구도 타지 않았고, 사용을 위해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안장이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등에 걸쳐놓았다. 예수님이 타신 안장없는 나귀는 그리 위엄찬 모습은 아니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며 거리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편다. 이것은 일종의 레드카펫으로 열왕기하에서 예후가 왕위에 등극할때 비슷한 예시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까는 행위 또한 절기 때 바닥에 깔았던 초목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분명히 초목들이 초막절 의식의 일부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초막절에 나뭇가지들을 들고 흔드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든 마가복음 본문에서는 그 나무 가지들을 길에 깔게 됨으로써 영광스러운 왕의 입장을 보여주고있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예수님의 앞 뒤로 ‘호산나!’ 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호산나는 시편 118편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 순례 시편에서 호산나는 환호로 사용되곤 했고 간청의 요소가 사라진 채 ‘할렐루야’ 같이 찬양의 제의적 외침처럼 사용되곤 했다고 지적된다. 어쨌든 이들의 함성과 환호, 그들의 옷으로 깔려진 카펫과 절기때 사용되던 나뭇가지들 모두가 왕의 등장과 입성을 축하하고 축복한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써 이 길을 가고 계신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스가랴 9장 9-10절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환호할 때 겸손하신 왕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리라고 예언되었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이 실현되는 것을 바라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환호성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지금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고 보아도 좋은 것은 이 모든 상황들을 예상하셨고 직접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왕의 행차는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아래 예수님의 주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예수님은 곧 ‘다윗의 자손’으로써 되실 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써의 왕, 사람들이 기대하는 왕을 뛰어 넘으실 것이다. 아직 사람들은 그 과정과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있는 힘껏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으실 것이다.
우리의 환호와 경배가 제아무리 ‘옳은 것’ 투성이라도, 진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깃들어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환호는 뒤집힐 수 있다. 이전의 본문들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로,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역전극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우리의 ‘옳음’에 취하지 말고, 참된 만남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자. 제자는 ‘팬’이 아니다. 팬이 아닌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깊이 알고 반응해야 한다. 그 참된 제자로의 삶을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