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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중풍병자에게 더 쉬운 일? / 마가복음 2:1–12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2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배경은 외딴 곳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다. 이전 절에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오실 수 없었다는 것과는 대비되게 예수님은 ‘집’에 계신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 왜 그 집에 계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주목 받지 않고 들어 올 수 있으려면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의 도움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마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베드로의 집이었다면 앞서 장모의 질병을 치유해준 집이 사람들에게 익숙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정이다. 분명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에 그 집으로 몰려들었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 중’이라는 사건의 배경이 중요하다. 말씀은 분명히 소음에 의해 끊어졌을 것이다.
3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4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중풍병 환자와 네 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수님이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가게 된다. R.T.프란스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1층으로된 구조물로 바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잇는 평평한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붕은 일하거나 잠자기 위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구조가 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가가 말하는 것처럼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라는 표현들은 시끄러운 파괴 작업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행위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을지 의아하다. 집 주인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도 적지 않는다. 상상해보면 아마 엄청난 비난과 모욕 속에서 작업은 이뤄졌을 것이고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거센 목소리들과 먼지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예수님은 이전의 본문에서 나병환자를 ‘분노하시며’ 치유하셨다. 이 분노는 질병 그 자체에 대한 치유임과 동시에 나병환자를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분노였으리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무리’들도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이 천장을 다 깨부수는 동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가는 그 모든 내용을 제거해버린다. 추측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꿈쩍하지 않던 사람들 중에 있던 율법학자의 말은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았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신다. ‘그들’은 아마도 중풍병자를 내리달은 네 명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모욕에도 천장을 뚫고 예수님을 찾았고 중풍병자를 내렸다. 그들은 어떤 각오를 가지고서라도 낫게 만들 간절함이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문제는 이상한 부분을 건드린다. 예수님께서 ‘질병’이 낫게 만드시는게 아니라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에 율법학자들이 곧바로 ‘마음 속으로 반박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엄청난 기적을 행하심으로서 그들의 기준에서는 안식일을 ‘범하셨’다. 게다가 열병이 난 시몬의 장모와 나병환자를 ‘만져서’ 낫게 만듦으로써 정결규례를 깨뜨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선언하신 순간, 곧바로 적대적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라며 질문한다. 이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실’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므로 죄 용서가 가능하시다.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을 간파하신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과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 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고 질문하신다. 그렇다면 문맥상 대답은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쉬운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더 어려운 답’을 일부러 선택하셨다. 사실 중풍병 환자와 친구들은 사람들이 비켜줘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편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붕을 뚫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반대다. 예수님은 ‘더 어려운 일’을 선택하시면서 그들의 마음 속을 폭로하신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을 선택하신 것도 결국 그걸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충분하시기 때문에 하신일이다. 그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더 어려운 일’ 죄용서를 위해 자신을 비난과 모욕과 반대의 목소리에 내주셨고 자신을 찢고 휘장이라는 하늘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께로 갈 길을 만들어 내실 것이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중풍병 환자를 고치신다.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하다. ‘크게 놀란다’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런 일을 본적이 없었다 라고 고백하지만, 그들은 진짜 참된 진의를 보지 못했다고 말할수밖에 없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겨우 ‘치유’의 사역이 아니다. 더욱 근원적인 ‘죄 용서’를 위해 오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다양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 끄집어낼 수는 없다. 본문의 의도도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용서의 능력이 사람들의 딱딱한 편견과 오만을 깨뜨리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과 권능으로 죄를 용서하실 권한도, 질병을 낫게 하실 능력도,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시며 가르치실 수 있는 지혜와 힘도 있으시다. 그분께 우리 삶이 놓여질 때에 비로소 그 참된 회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비난과 모욕이 있더라도 우리의 장애물을 깨뜨리고 예수님을 만날수만 있다면 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길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