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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말씀과 기도부터 | 사도행전 1:12–26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2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3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거리의 가까움은 제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장소였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올리브 산과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삼으셨고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었다. 성 안에 머무르고 있었던 다락방도 매우 익숙한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방이었는지,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있는 방이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회집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장소에 모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와 함께 여자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동생들도 있었다는 점이 언급된다. 엄밀하게 여자들이라는 표현은 사도들의 아내들을 칭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혈육중에 여동생들도 존재한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고, 제자들의 자녀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다음 절에서 그 수가 120명이 된다는 것을 읽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이 공동체에서 여성들과 남성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것보다 ‘기도’가 선행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아야 한다. 어떤 것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다. 그들이 ‘기다려야 할’ 하나님의 약속하신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은 오직 ‘기도’라는 통로 속에서 경험될 것이다.
15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16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17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18 그런데, 이 사람은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
19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자기들의 말로 아겔다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피의 땅’ 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서 분명히 베드로는 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앞장서서 열두 사도를 다시 확립할 것을 제안하면서 지도력을 보인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반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반론이 있겠지만 베드로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부정할만한 근거들은 아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을 설명하면서 아겔다마, 피의 땅을 언급한다. 이 사건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정도로 유명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알려져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했던 것으로 연결시킨다. 최초의 교회 공동체는 ‘기도’로 세워졌고,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발견하는 공동체였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비극적이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함으로써 ‘경고’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건’에 집중하지 않고 ‘성취되는 말씀’에 집중한다. 오로지 ‘말씀’안에 해석된 사건들이 공동체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고있다.
20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가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성취는 이어서 말씀에 대한 순종과 복종으로 나아간다. 베드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룟 유다의 비참한 죽음으로 그의 자리가 폐허가 된 것과 그 직분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들어 새로운 사도를 준비시킨다. 이때 새로운 사도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던때부터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열두명의 사도가 예수님과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제자들이 따라다녔고 열둘 외에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던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지금 이 자리에도 함께 있으면서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로써 사도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될 것이다. 사도는 예수님의 시작부터 부활까지의 모든 일들을 경험한 사람임과 동시에 부활을 땅 끝까지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삶,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의 의미를 자신의 경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23 그리하여 그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서,
24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25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26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자 제자들도 있었다. 여기 요셉과 맛디아를 임의로 선정해서 사도로 세운 것이 과연 의미가 있었던 것이냐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곤 하지만, 우리는 당시의 상황에서 사도로 선출되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잘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사도의 직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두려운 일이라는 말이다. 두 사람은 아마도 기꺼이 각오하며 나왔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70인의 전도대원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도 말씀 선포를 통한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했었을 것이므로 이 일에 적임자이었음이 틀림없다.
이제 새로운 사도는 ‘기도’를 통해 선출된다.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를 통해 제비 뽑기라는 현실적 방법으로 뽑혀진다. 제비뽑기는 구약에서도 허용된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 장면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 제자 맛디아를 잘못 뽑은 것이라고 폄훼할만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게 말해서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서, 다른 신약 성경에서 등장하는가 질문해봐야 한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사명에 따라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복음을 전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처음이고 두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깃발을 들고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며 영광스러운 사도의 직분을 얻으려했던 두 사람의 믿음과 용기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계속된 말씀과 기도의 강조와 그것을 실재적으로 적용하는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모든 부분에서 적용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의 시작, 문제의 발견, 대안 제시가 기도와 말씀 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배워야 할 줄 믿는다. 그랬을 때 우리의 교회가 아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말씀과 기도로 세워진 교회가 행해야 할 사명이다. 그들은 어떤 ‘직분’과 ‘기능’을 위해서 사도를 뽑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말씀에 근거하여 부활을 증언할 ‘증인’을 뽑기 위함이었다. 그 일이 위험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했음에도 기꺼이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최초의 교회 공동체 모두가 그러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말씀과 기도 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는 지금도 우리가운데 일어날 줄 믿는다. 그 사명을 다시 생각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