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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내가 좋아하는 설교가 아니라 / 예레미야 28:1–1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하필QT] 내가 좋아하는 설교가 아니라 / 예레미야 28:1–1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같은 해, 곧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째가 되던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다.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3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4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시드기야가 다스리던 4년 째 해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성전에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하기 시작한다. 하나냐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야의 메시지 핵심은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버렸다는 것이다. 시제 자체로는 ‘과거’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꺾어버리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고 확정해서 표현하는 예언적 수사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포로와 기물들은 돌아올 수가 없다. 하나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벌어지는 실재 사건’에 의해서 입증될 것이다. ‘말’은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증’은 말이 성취될 때만 가능해진다. 예언에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직접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냈다면, 그것이 가짜일 경우 마땅한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5 그러자 예언자 예레미야가 주님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냐에게 대답하였다.
6 그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주님께서 성취해 주셔서, 주님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가 바빌로니아에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를, 나도 바라오.
7 그러나 당신은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시오.
8 옛날부터 우리의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님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예레미야는 곧바로 하나냐에게 답변한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이 말한 예언의 내용을 자신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고는 이뤄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이 말 자체가 가져오는 긴장감은 ‘누가 참 선지자, 무엇이 참된 예언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예레미야의 말에 따르면 선배 예언자들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예언된 일들에 대한 성취이다. 따라서 선배 예언자들의 말은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성취되어가는 중이다. 예레미야의 말은 그 거대한 물줄기에서 뻗어나온 거스를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냐의 말은 어떤 ‘근거’나 역사적 흐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진실성 어느것 하나도 입증되지 않았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명된 말’이 필요하다. 평화를 예언했기 때문에 그 말이 성취된 뒤에야 참 예언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독보적인 예언적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될 것이다.
10 예언자 하나냐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렸다.
11 그리고 하나냐는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년 안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이와 같이 꺾어 버리겠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떠났다.
12 예언자 하나냐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린 뒤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꺾어 버렸으나, 오히려 그 대신에 쇠로 멍에를 만들고 말았다.
14 진실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모든 민족의 목에 쇠로 만든 멍에를 메워 놓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수밖에 없다. 나는 심지어 들짐승도 그에게 넘겨 주었다.’ ”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린다. 예레미야의 목에 멍에가 있었다는 것은 27장에서 하나님께서 멍에들을 만들어 밧줄을 달고 목으로 메어 시드기야를 만나러 온 사절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명령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 멍에를 계속 메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그 상징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복제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나무 멍에가 예레미야의 심판예고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하나냐는 그 나무 멍에를 꺾어버린다. 그의 ‘행위’는 굉장히 임팩트 있었을 것이다. 행위 메시지와 더불어서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꺾어버리겠다 라고 말함으로써 행위와 메시지를 결합하는 아주 탁월한 위로의 설교였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그 앞에서 아무말도하지 않는다. 그는 그 앞에서 메시지로 패배를 경험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주 정반대의 말이었다. 하나냐는 ‘나무’ 멍에를 꺾었지만, 그로인해 이제 ‘쇠로 된 멍에’를 매게 되었다. 이제 모든 민족은 더 가혹하고 엄혹한 짐을 메게 될 것이다. 심지어 멍에를 전혀 맬 일이 없는 ‘들짐승’들도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 말은 그 모든 통치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15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하였다. “하나냐는 똑똑히 들으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도록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이 지면에서 영영 없애 버릴 것이니, 금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네가 나 주를 거역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
17 예언자 하나냐가 바로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은 더 있었다.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탁월한 설교가였는지는 모르지만, 참 예언자는 그 일어난 일로 판단받고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냐를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그의 거짓말로 사람들이 혼동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심판으로 죽게 될 것을 예고 받는다.
그리고 그 말은 바로 ‘그 해’ 이뤄지게 된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더욱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어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이뤄지고 성취된 것이 점점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나머지 기물들이라도 빼앗기지 않도록, 더 심각한 심판과 몰락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심판이 아닌 위로의 메시지에 중독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들에게 더 큰 멍에와 심판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점점 확정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탁월한 설교가들의 쏟아지는 메시지들 속에 산다. 그러나 결국 ‘말’과 ‘행동’을 넘어 ‘성취’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 메시지는 확인되고 성취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시급하다. 또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순종함이 필요하다. 오늘 그 순종의 삶 속에서 말씀이 성취되고 이뤄지는 곳에서 참된 회개와 변화의 삶 살아가기를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