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과 답변의 목적이 율법을 폐기하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율법학자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것이 율법의 목적과 의의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우리는 이전에 부자 청년에게서 비슷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와 ‘가장 으뜸 되는 계명’을 묻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인 율법의 실행과 완성, 그 목적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계명’ ‘가장 으뜸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질문은 어떤 ‘특정’ 율법조문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모든 도덕적 원리’까지 포함하여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을 질문했다고 지적된다. 하나님의 법이 목적을 가진 법들만이 아니라 일반 도덕법까지도 포함되어져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최고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우리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라는 신명기 6:4절의 선언을 듣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핵심적 문구였다. 톰 라이트는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어 암기되는 일종의 ‘기도문’이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중요하게 다뤄졌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다하고 힘을 다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실재로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지적한다. 그 예시로 제 2 성전기 문서들의 증언들에서 목숨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를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피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삶으로 구현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며 그것을 위해서 마음과 뜻과 힘 뿐만 아니라 ‘목숨’을 다한 사랑을 올려드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랑은 비이성적 무논리적인 복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명기 6:5절은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뜻을 다하고’ 라는 동사가 추가되어 있다. ‘뜻’이라고 번역된 디아노이아는 이해, 지성, 마음, 생각 이라는 폭넓은 생각을 담은 단어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이성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로마서 12장에서 ‘영적 예배’ 라고 번역된 것도 ‘로기켄 라트레이안’으로 새번역에 따라 ‘합당한, 합리적인’ 예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데, 마찬가지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두번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웃’을 얼마나 확장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올 것이다. 이웃은 언약 공동체의 이웃 구성원을 의미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한적인 사람들만이 이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 제시하신 사마리아인을 넘어서는 더욱 포괄적인 환대의 이웃이 제시된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따라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원수’를 향한 사랑까지 포함할 것이다.
한편으로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농도와 깊이가 어때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결코 ‘네 몸’이 가지는 의미를 축소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연민하며 사랑한다. 따라서 환대와 사랑에 있어서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떤 순간에도 해야할 연민과 포용을 의미할 것이다.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계명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와 둘째라는 표현은 ‘크다’, ‘작다’와 상관이 없다. 다만 하나의 큰 계명을 순서적으로 표기한 것 뿐이다. 어쨌든 이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명료한 방식으로 정리된다.
32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율법학자는 신명기 6:4절을 적절히 따로 분리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다른 이는 없다’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사랑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이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랑’이라는 포괄적인 면에서 매우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사항은 참된 신, 참된 하나님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이 무조건적인 포괄과 포용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랑’은 반드시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한 남자는 한 여자만 선택한 사랑을 할 때에만 진정한 사랑으로 인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사랑’만이 율법이 말하는 합당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율법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번제와 희생제사’보다 더 낫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제의적인 율법’ 위에 ‘사랑’의 가치를 우선하여 둔다. 이로써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사법 보다 ‘사랑의 법’이 더 우월하고 포괄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율법이 어떤 것인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의 대답을 ‘슬기롭다’고 평가하신다.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다. 그가 인정하는 것처럼 목숨을 다한 사랑, 온전한 헌신, 포괄적 환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합당한 예배가 완성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십자가는 목숨을 다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 온전한 헌신을 보여 주신다. 또한 죄인과 원수마저 용서해달라고 구하시는 제한없는 포괄적 환대를 보여주신다. 뿐만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논리적 귀결에 대한 심판을 당하신 것이며 마땅히 해야할 제사들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예배의 완성이었다.
오늘 우리의 십자가를 묵상해보자. 목숨을 다한 사랑, 온전한 헌신, 포괄적 환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삶의 합당한 예배가 녹아진 진짜 십자가를 온전히 질 수 있을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가능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