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젊은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 엄격하게 다짐하였다.
2 여자나 유혹하고 다니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주실 몫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주실 유산은 무엇이겠는가?
3 불의한 자에게는 불행이 미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닥치는 법이 아닌가?
4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신다. 내 모든 발걸음을 하나하나 세고 계신다.
5 나는 맹세할 수 있다. 여태까지 나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6 하나님이 내 정직함을 공평한 저울로 달아 보신다면, 내게 흠이 없음을 아실 것이다.
7 내가 그릇된 길로 갔거나, 나 스스로 악에 이끌리어 따라갔거나, 내 손에 죄를 지은 흔적이라도 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거두어 먹어도, 내가 지은 농사가 망하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한번 욥이 자신의 정직함과 완전함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욥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으면 그에대한 벌을 받게 된다는 보응신학을 분명히 공유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적용될만큼 자신이 잘못된 인생을 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먼저 욥이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탐욕’에 대한 것이다. 특별히 욥은 젊은 여인을 유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다른 아내를 탐내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탐욕은 단지 여성에 대한 탐욕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의 집, 밭, 남종, 여종, 소, 나귀 할 것 없이 모든 종류의 탐욕과 연결되고 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정직함과 공평함을 가지고 판단하신다면 욥이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욥은 탐욕의 죄를 범하지 않았다. 주어진 것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나누고 베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해서 지금 벌을 받는 중이라면 기꺼이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변할 것이다.
9 남의 아내를 탐내서, 그 집 문 근처에 숨어 있으면서 그 여인을 범할 기회를 노렸다면,
10 내 아내가 다른 남자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11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아야 마땅한 범죄다.
12 그것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불, 사람이 애써서 모은 재산을 다 태우는 불이다.
욥은 계속해서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이 범죄는 이전의 젊은 여인에 대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일처다부제의 문화에서 젊은 여자는 거둬서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결혼한 여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욥은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 ‘사형선고’를 받아 마땅한 범죄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뢰를 깨뜨리고 말초적인 자극과 탐욕에 굴복하는 인격을 파괴시키는 행위다. 그래서 그런 행위는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태워버릴 것이다.
13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내게 탄원을 하여 올 때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14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러 오실 때에, 내가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15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
욥은 종들에 대한 학대를 행하지 않았다. 종들을 도구취급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과 종의 관계이며 하나님께서 바로 그 종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접근을 제공하는데, 사회적 계층과 직업이 ‘사회 문화’적으로 종을 인정할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하나의 인격으로써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16 가난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할 때에, 나는 거절한 일이 없다. 앞길이 막막한 과부를 못 본 체 한 일도 없다.
17 나는 배부르게 먹으면서 고아를 굶긴 일도 없다.
18 일찍부터 나는 고아를 내 아이처럼 길렀으며, 철이 나서는 줄곧 과부들을 돌보았다.
19 너무나도 가난하여 옷도 걸치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나, 덮고 잘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마다,
20 내가 기른 양 털을 깎아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다. 시린 허리를 따뜻하게 해주었더니,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축복하곤 하였다.
21 내가 재판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아를 속이기라도 하였더라면,
22 내 팔이 부러져도 할 말이 없다. 내 팔이 어깻죽지에서 빠져 나와도 할 말이 없다.
23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차마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를 도운 이야기는 이전에도 욥이 항변한 적이 있었다. 욥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근거로 전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런 일을 행한적이 있다면 내신의 팔이 부러지고 어깻죽지에서 빠져나가도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욥은 확고하게 자신의 인생이 결코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노라고 항변하고, 그 항변은 정당하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의 도덕이 얼마나 무참히 무너져버렸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시대의 탐욕은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온갖 중독의 요소들에 쉽게 삶을 빼앗기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성적인 타락이 심각한 것도 큰 문제다. 성적 타락을 자신의 몸에 대한 주권이라고 생각하면서 결혼과 관계를 왜곡하는 행위들이 넘쳐난다. 고대 시대에 종이 ‘도구’ 취급되는 시기임에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의 인격으로 보려고 했던 관점은 사람을 도구취급하며 돈으로 평가하며 너무 쉽게 갑질하는 태도를 가지는 뉴스들과 너무나 대조된다. 고아와 과부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약자들을 보호하기보다 돈있는 자들, 강자들을 위한 법과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비극이다.
이 모든 것의 근거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생각해봄직하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리없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인간의 오염된 본성이 정의롭게 재판을 이끌어갈리 없다. 정의롭지 않은 재판에 인간적 법률이 두려워질리없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정의와 공의를 되찾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소망을 잃고말것이다.
이 시대의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오염된 인간의 본성은 결코 그런 시대, 그런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는 사람들에 의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은 자들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 그런 시대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욥의 항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직하게 살아간 삶의 이야기다.
2.
모든 근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의와 공의를 지키는 것이 심판을 피할 길이다.
4.
그런 일들은 오로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