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의 평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으냐?
2 저물기를 몹시 기다리는 종과도 같고, 수고한 삯을 애타게 바라는 품꾼과도 같다.
3 내가 바로 그렇게 여러 달을 허탈 속에 보냈다. 괴로운 밤은 꼬리를 물고 이어 갔다.
욥은 다시 자신의 인생이 고된 종 살이로 쉬지 못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런 인생의 종살이에 대한 개념은 고대 근동에서 신들의 봉사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욥이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주목하고계신다고 고백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고백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죄의 결과 고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연결된다. 원래의 노동은 고귀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영광스럽고 보람있는 것이지만, 죄의 결과로 이뤄진 노동은 힘겨운 고통을 수반한다. 욥이 이전에 엄청난 거부로 성장하기까지의 노동을 생각해보면 지금 당하는 고통은 영광, 보람과 상관없는 고통스러운 노동일 뿐이다. 욥은 차라리 죽음으로 안식을 취하고 싶다.
4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5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6 내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구나.
고통의 끔직함은 반복된 노동으로 심화된다. 잠이 깨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므로 잠들기만 하고 싶지만 그런 안식이 주어지지 않은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런데 이런 고통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어떤 소망의 결과 없이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한탄한다. 베틀의 북은 생산성을 가지고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소망이 없이 그저 종말이 다가오고있다.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내가 다시는 좋은 세월을 못 볼 것입니다.
8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뜨고 나를 찾으려고 하셔도 나는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9 구름이 사라지면 자취도 없는 것처럼, 스올로 내려가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올라올 수 없습니다.
10 그는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고, 그가 살던 곳에서도 그를 몰라볼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삶과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이 ‘허무’한 것임을 말한다. 이런 허무는 전도서를 생각나게 만든다. 욥은 해 아래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서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욥은 허무로 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욥은 죽음 이후의 소망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저 사라지고 없는 존재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고통에 찬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졌을 때 얼마나 비참한 독백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와도 단절된 욥에게는 이제 죽음 이후의 안식이란 것도 단지 소멸되는 것으로 어떤 결과물 없이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이 된다.
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14 주님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께 항변한다.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고 따져묻는다. 하나님은 지금 욥을 바다괴물, 리워야단처럼 다루신다. 리워야단은 악의 상징물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욥을 ‘악’으로 규정하시고 다루고 계신다. 욥은 자신이 악의 상징물처럼 다뤄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악을 한시도 가만 두지 않으시듯이 자신을 그렇게 감시하시고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심지어 잠을 자는 순간에도 악몽으로 깨어나게 만드신다. 안식없이 쉼없이 고통에 완전히 절여지는 인간의 고통을 호소한다.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는 욥의 결론은 ‘허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금 전도서의 ‘허무’ 주제를 확인하게 된다. 욥의 나날은 ‘허무’ 헤벨이다. 구름과 같고, 연기와 같아서 사라져버리고 말 그 무엇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좋았던 것들조차도 지금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명예도, 가족도, 친구도, 건강도, 자신의 뼈와 살도 사라지고 있다. 말라버리는 인생은 차라리 죽음으로라도 안식을 찾고 싶다. 이제 끝내고 싶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21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우리는 시편 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길래 주께서 사람의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노래하는 시를 떠올려볼 수 있다. 동일한 어구를 사용하고있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모든 나라와 만물에 대한 승리와 영광으로 다스리는 왕의 등장을 노래하지만 오늘 욥의 노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자신을 때리고 치시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고 죄와 허물을 가진 존재일 뿐인데 눈동자를 떼지 않으시며 주목하고 계신다고 원망한다. 아침마다 주의 선하심을 발견하는게 아니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의 용서 없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얼마나 허무하고 좌절스러운지 죽으면 하나님이 찾으셔도 이미 없는 몸이 될 뿐이라며 원통함을 말한다.
우리는 오늘 욥의 한탄과 원망의 이야기가 전도서의 헛됨, ‘헤벨’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런 욥의 헛됨에 대한 인식은 해 아래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기쁨과 즐거움 없는 오로지 고통으로만 가득찬 노동과 괴로움이다. 그 결과 허무한 것으로 결말내려질 뿐이라면 고통의 연속 속에서 안식하길 원한다.
욥과 마찬가지로 해 아래 벌어지는 고통에 대한 인식은, ‘해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왜곡되게 느껴질때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허무를 이길 방법은 ‘해 위’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의도를 깨닫는 것이다. 욥은 바로 그 시도를 하고 있다. ‘해 위’에 계시는 분, 원래대로라면 영광스러운 노동과 인자와 자비로 사람들을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분께서 나에게 이 일을 왜 하시는지에 대한 정확한 의도를 알기 원하는 것이다. 욥의 기도는 결코 ‘허무’를 찬양하고 죽음을 바라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역설이다. 허무와 죽음이 더 나은 상태지만 하나님의 의도와 참된 일하심을 발견될 때 의미를 되찾음으로 이 물음이 해소될 수 있으니 답변해달라는 것이다. 욥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호소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따져 묻는다. 해 위의 일을 알려달라, 허무를 이길 참된 소망과 위로와 안식을 달라, 지금 이 고통의 의미를 되찾게 해달라.
분명히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욥의 절규와 절망은 큰 호소력을 갖는다. 삶의 허무에 공감하며 이제는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해 아래’의 일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도서가 말하는 바와 오늘 욥의 역설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볼 때, 사람이 누구시길래 주목하시느냐는 이야기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헤세드를 발견할 때 고통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으로 바뀌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최종적 목적은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이다. 그것이 참되게 ‘헤벨’이 극복된 이야기다. 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인생의 헤벨을 이길 수 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된다. 이것이 참으로 해 위에 일어난 위로와 소망이다.
오늘 말씀 묵상하면서 인생의 허무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 우리를 주목하시며 일어서게 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붙들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인생의 허무는 부활이 없을 때 소멸되는 죽음을 긍정한다.
2.
해 아래 인생의 고통은 의미를 찾을 수 없지만, 해 위에 일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3.
참된 헤벨의 극복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