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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최후 심판의 의미 / 욥 18:1-21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였다.
2 너는 언제 입을 다물 테냐? 제발 좀 이제라도 눈치를 채고서 말을 그치면, 우리가 말을 할 수 있겠다.
3 어찌하여 너는 우리를 짐승처럼 여기며, 어찌하여 우리를 어리석게 보느냐?
4 화가 치밀어서 제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아, 네가 그런다고 이 땅이 황무지가 되며, 바위가 제자리에서 밀려나느냐?
빌닷은 욥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욥은 생각도하지 않고 말을 쏟아낸다. 기다리지도 않고 답변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들은 잠언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잠 18:13은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 라고 말한다.
빌닷에 의하면 욥은 친구들의 지혜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짐승 수준의 지혜로 취급하고 있는데 오히려 욥이 그런 미련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갈기갈기 찢는’ 이라는 표현은 마치 사나운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찢어 먹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욥의 미련함은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행위이며 스스로의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결국 악한 자의 빛은 꺼지게 마련이고, 그 불꽃도 빛을 잃고 마는 법이다.
6 그의 집 안을 밝히던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환하게 비추어 주던 등불도 꺼질 것이다.
7 그의 힘찬 발걸음이 뒤뚱거리며, 제 꾀에 제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8 제 발로 그물에 걸리고,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니,
9 그의 발뒤꿈치는 덫에 걸리고, 올가미가 그를 단단히 죌 것이다.
10 땅에 묻힌 밧줄이 그를 기다리고 길목에 숨겨진 덫이 그를 노린다.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재앙은 ‘빛’을 꺼지게 만들고 빛을 잃게 만든다. 빛이 지혜와 생명을 상징하는 것들이라면 스스로 불러일으킨 재앙은 욥의 생명을 갉아먹고있다. 빌닷의 표현에서 ‘악한 자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빌닷의 논지는 욥이 ‘악인’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친구들은 욥을 ‘악인’으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욥이 당한 끔찍한 재난이 바로 ‘악’의 증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찬 발걸음과 성공가도를 가는 듯한 모습들도 빛을 잃고 꺼져가며 함정에 빠져 덫에 걸리고 올가미에 붙잡힌 모든 것들이 ‘악’의 결과물이다.
11 죽음의 공포가 갑자기 그를 엄습하고, 그를 시시각각으로 괴롭히며, 잠시도 그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12 악인이 그처럼 부자였어도, 이제는 굶주려서 기운이 빠지며, 그 주변에 재앙이 늘 도사리고 있다.
13 그의 살갗은 성한 곳 없이 썩어 들어가고, 마침내 죽을 병이 그의 팔다리를 파먹을 것이다.
14 그는, 믿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죽음의 세계를 통치하는 왕에게로 끌려갈 것이다.
15 그의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집에 남아 있지 않으며, 그가 살던 곳에는 유황이 뿌려질 것이다.
빌닷의 끔찍한 악인의 종말은 마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옥’을 떠올리게 만든다. 살갗은 썩고 팔다리가 병에의해 파여질 것이다. 우리는 욥이 죽음에 대해서 묘사할때 썩은 환부를 파먹는 구더기를 이야기 했기 때문에 바로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죽음의 세계를 통치하는 왕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이 상상의 죽음 세계는 명백히 원래 욥이 머무르던 곳이 아니다. 원래 살던 곳에 유황이 뿌려질꺼라는 것은 ‘불’이 떨어져 타버린 자녀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유활불로 타오르는 지옥의 세계에 붙잡힌 한 인간을 묘사하는 것 같다. 악인의 결말은 ‘지옥’이다.
16 밑에서는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의 가지가 잘릴 것이다.
17 이 땅에서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느 거리에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18 사람들이 그를,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어, 사람 사는 세계에서 쫓아낼 것이다.
빌닷은 다시 식물의 예시를 들면서 뿌리가 마르고 가지가 잘린 상태의 식물을 예시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부르지 않는 완전히 말라버리고 잊혀진 존재가 될 것임을 상정한다. 사람들은 이런 악인을 밝은데서 어두운 곳으로 쫓아낸다. 우리는 어떤 예시를 떠올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쓸모 없는 나무를 불에 태우시리라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풀무 불 또는 바깥 어두운데 내던져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빌닷이 설명하는 악인의 최후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언어들과 일맥상통하는 것들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적용의 대상’이 전혀 틀렸다. 그 말씀의 적용은 억울한 의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않으며 위로하지 않으며 슬픔에 동참하지 않는 욥의 친구들, 바리새인들에게 더욱 가까운 말이었다.
19 그의 백성 가운데는, 그의 뒤를 잇는 자손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집안에는 남아 있는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0 동쪽 사람들이 그의 종말을 듣고 놀라듯이, 서쪽 사람들도 그의 말로를 듣고 겁에 질릴 것이다.
21 악한 자의 집안은 반드시 이런 일을 당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사는 곳이 이렇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a에서 b까지라는 표현은 a에서 b까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의 사람들이 종말과 말로를 듣고 놀라고 겁에 질리는 것은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그 비참한 말로를 듣고 알게 되며 두렵고 겁에 질리게 되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당하게 될 말로의 끔찍한 종말을 꼬집으며 지금 욥이 바로 그런 상황, 그런 집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악인들의 종말이 반드시 이러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악인들의 종말은 이 땅, 곧 현세에서 완벽한 형태로 경험하기란 어렵다. 잠언과 전도서는 악인들에 대한 마지막의 입장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잠언은 악인의 삶은 곧 안개와 허무한 것으로 사라지고 말것이라고 말하지만 전도서는 악인들이 건강하고 명예롭게 죽을 것이기 때문에 악인의 죽음에 대한 분노도 헛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해 아래에 벌어지는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는 억울한 종말들은 분명히 우리가 너무나 많이 발견하며 산다. 그러나 그것은 ‘해 아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죽음이 모든 것들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있다. 그곳에서 악인들의 최종적인 심판은 정의롭고 온전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당하게 될 최후는 비참할 것이다.
다시말해 빌닷의 악인의 종말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심판의 메시지는 ‘악인과 죄인’에게 전해져야 하지 죄없이 고통당하는 자에게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수신자가 전혀 잘못되었다. 오히려 심판과 종말을 이야기하며 두려운 마지막을 선언하는 ‘심판자’로써 욥을 겁박하는 빌닷이야말로 ‘악인’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했다.
우리는 분명 지옥의 두려운 심판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영원한 죽음의 끔찍한 종말은 악인들을 위함이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정신을 지배하려고 하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악인들의 종말이 있다는 것은 참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의 메시지여야지 겁박의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된다.
말씀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과 시련의 배후, 악이 소멸하고 종말을 맞을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었으면 좋겠다. 그 마지막 날은 반드시 온다. 그때 우리의 고통과 아픔의 사건들은 반드시 신원될 것이며 억울함은 해소될 것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놓치 않는 씨름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마지막의 소망을 굳게 붙잡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악인들의 종말은 분명히 있다.
2.
그러나 현생에서 그 종말을 모두 확인할 수 없을 수 있다.
3.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처단하실 날을 믿는다.
4.
그 마지막 날은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닌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