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엘리후가 말을 이었다.
2 조금만 더 참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3 나는 내가 가진 지혜를 모두 다 짜내서라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대신’ 하여 발언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한다. 엘리후가 중개자의 입장에 서려고 했다는 점은 우리가 충분히 확인해봤다. 엘리후는 하나님 편에서 중개자 역할을 자처한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중개자 역할을 감당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예수님의 중보 역할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심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을 향해 변호하시는 역할도 있다. 엘리후의 중개자 역할은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4 내가 하는 이 말에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건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금 욥 어른과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은 큰 힘을 가지고 계시지만, 흠이 없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또 지혜가 무궁무진 하시므로,
6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십니다.
7 의로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보좌에 앉은 왕들과 함께 자리를 길이 같이하게 하시고, 그들이 존경을 받게 하십니다.
8 그러나 의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쇠사슬에 묶이게 하시고, 고통의 줄에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는 동안에
9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한 일을 밝히시며, 그들이 교만하게 지은 죄를 알리십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건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권선징악’의 논리를 다시 주장한다. 하나님은 악한자들을 살려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신다. 의로운 사람을 지켜주시며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고통의 줄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신다.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은 이 논리 아래서 자신들의 불복종이 탄로난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교만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죄의 폭로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후의 주장에 따라 욥은 교만한 자이며,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죄에 대한 폭로다.
10 하나님은 또한, 그들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시고, 그들이 악을 버리고 돌아오도록 명하십니다.
11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면, 그들은 나날이 행복하게 살고, 평생을 즐겁게 지낼 것입니다.
12 그러나 그들이 귀담아 듣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세계로 내려갈 것이고, 아무도 그들이 왜 죽었는지를 모를 것입니다.
13 불경스러운 자들은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지 않습니다.
14 그들은 한창 젊은 나이에 죽고, 남창들처럼 요절하고 말 것입니다.
엘리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귀를 열어 경고를 듣고 돌아오도록 만드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런 예시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을 통해 침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작정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기면 행복과 즐거움이 돌아온다. 그렇지 않을 때는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죽음의 상태가 닥쳐온다. 이유를 모르는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 욥이 두려운 듯이 말하며 어서 속히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해소해주시길 구했었는데, 엘리후는 그런 두려움이 하나니므이 심판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15 그러나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
16 하나님은 욥 어른을 보호하셔서, 고통을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평안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고, 식탁에는 언제나 기름진 것으로 가득 차려 주셨습니다.
17 그러나 이제 욥 어른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형벌을 받고 계십니다. 심판과 벌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18 욥 어른은 뇌물을 바쳐서 용서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속전을 많이 바친다고 하여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19 재산이 많다고 하여 속죄받을 수 없고, 돈과 권력으로도 속죄를 받지 못합니다.
20 밤이 된다고 하여 이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니, 밤을 기다리지도 마십시오.
21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른께서는 지금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마는, 이 고통이 어른을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라는 주장을 반복해서 진술한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말처럼 고통은 ‘사이렌’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의 경고를 고통을 통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런 경고를 들으라고 권면한다. 뇌물이나 속전을 통해서 고통을 빠르게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고통 속에서 바른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물론 고통의 긍정적인 측면을 바르게 지적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용의 대상이 완전히 틀렸다. 욥은 고통을 빠르게 벗어나려거나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무시하려는게 원망의 이유와 목적이 아니다. 욥은 다만 죄가 없음에도 고통 당하는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억울함이 신원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회개와 그에 따르는 은혜의 복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22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23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도 없고, “주님께서 옳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꾸짖을 사람도 없습니다.
24 하나님의 업적은 늘 찬양받아 왔습니다. 욥 어른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셔야 합니다.
25 온 인류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멀리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광대하심은 절대적으로 옳은 일, 선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 ‘옳지 못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도 반드시 옳은 일을 하셨던 하나님을 판명될 것이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의 일을 찾양해야 한다. 지금 눈 앞에 불펴불만이 터져나올만한 일들로 가득하더라도 찬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 일이 선한 것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의 발언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절규에 찬 발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적이 없기 때문에 틀린말이 되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무한을 인간의 유한에 직접 가져다대면 안된다. 당연히 미래의 완성된 시점에는 ‘선한 것’으로 드러나겠지만, 현재의 시점에 ‘부르짖음’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호소를 ‘향로’에 담아 하나님께 가져간다고 말한다.
우리는 엘리후의 발언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한다. 고통이 교훈의 목적으로써 하나님께 되돌아오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지점을 긍정하며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고 동의할 수 잇다. 그러나 고통이 ‘교훈의 목적’만을 가졌다고 판단하기에는 거대한 우주적 왜곡을 무시할 수 없다. 심각한 고통의 문제가 교훈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더욱 비참한 설명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전쟁과 끔찍한 재앙같은 죽음들과 문제들이 ‘교훈’적 목적만 가졌다면 너무나 잔인한 설명이 되고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발언하시는 때 이 ‘거악’을 하나님께서 관리하고 계시며 이기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다시 정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지금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행위가 전혀 무의미한 행위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한다. 그 안에 교훈의 기능이 포함될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있다. 그것은 부가적인, 그러나 매우 효과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도 찾고 부르짖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만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때 고통이 해결됨을 경험할 것이다.
묵상 포인트
1.
고통은 교훈적인 기능을 포함한다.
2.
그러나 고통이 교훈적인 기능만 있을 수는 없다.
3.
하나님은 분명 고통의 문제를 제어하시고 관리하신다.
4.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