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든 이교도든 ‘축귀’에 대한 언급은 자주 발견된다. 사도행전을 참고하면 돌아다니며 축귀하는 유대인들이 언급되는데 주석가들에 따르면 알려진 전문적으로 축귀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봤는데, 그 사람은 ‘제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요한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보고한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이길래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일까 질문이 든다. 그가 만약에 제자가 아닐 뿐더러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넓은 제자 그룹, 70명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축귀 사역을 막은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축귀 사역이 ‘성공’ 했던 것으로 보여지고, 요한이 본문의 앞뒤 내용에서 ‘누가 더 큰자냐, 누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는 12명의 핵심제자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판단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말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제자들의 망신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다. 예수님과 독점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드러난다고 평가할 수 있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지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면 ‘적’일 리는 없다는 점을 말씀하신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핵심제자, 또는 70인의 제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기적을 행했다면 최소한 그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기적의 주체이신 분에 대해서 긍정적인 편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시면서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이들이므로, 그들과 대적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어떤 ‘내부자’와 ‘외부자’의 경계를 볼 수 있는 본문들을 종종 만나는데 예수님의 지적은 제자들만큼은 ‘외부자’와 긋는 선에서 분파를 만들기보다 [교회]로써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죄짓게 하는 사람’은 원어로 스캔들의 어원이되는 스칸달리조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변절’을 뜻하는 단어로 종종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죄짓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제자도를 방해하고 무력하게 만들어서 예수님으로부터 변절 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큰 맷돌은 동물이 짊어지고 돌리는 커다란 맷돌이다. 따라서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일은 즉시 죽음을 예상할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진술들은 ‘남을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스캔들에 빠지는 것은 자신이 직접 변절하는 것이므로 커다란 형벌이 기다리고있다. 그 벌은 ‘꺼지지 않는 불’로 표현되는 게헨나, 지옥이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어원으로 한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쓰레기 더미가 계속 불탔던 곳이다. 그런 장소에 떨어지는 것은 파멸이며 쓰레기 폐기장과 같은 더럽고 오염으로 가득찬 곳에 버림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악한 자의 운명으로 불과 구더기의 조합이 제시되는 것은 제 2성전기 문헌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들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경우를 더 크게 보게 만든다. 스스로의 ‘손’과 ‘발’과 ‘눈’이 스캔들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은 지옥에 들어갈바에야 차라리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잘라버리는 것이 ‘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생명과 지옥도 영원한 ‘분리’를 말하고자함임을 알 수 있다. 꺼지지 않는 불을 피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선택해야하며 게헨나와는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들과 분리 되어야 한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레위기 말씀에 의해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을 치라고 되어 있다. 49절은 불로 소금을 치듯 하라고 하심으로써 희생제물을 실재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자들은 소금과 불의 결합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불은 빈번하게 종말론적 고난을 가리키고, ‘소금’이 예배와 관련된 것이라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온전히 헌신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희생제물이 되는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는 대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따라서 불로 소금을 치듯 하는 과정은 ‘소금’이 되는 제자가 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소금’이 방부제나 청결, 맛내기, 등에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세상은 소금이 없이는 견딜 수 없다는 랍비들의 말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겠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잃을 때 상실된다. 실재 소금은 그 기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서 얻는 소금을 생각할 때 소금이 맛을 잃은 경우는 ‘불순물’이 가득한 상황이다. 불순물이 가득한 상태가 맛을 잃은 소금이고, 맛을 잃은 소금이, 스캔들에 빠진 상태라, 불순물을 ‘제거’하고 불을 소금치듯하는 정결과 순결함으로 변화되지 않는 이상 차라리 버림받는 것이 낫다!
소금이 제사에 사용된다는 점과 더불어 ‘언약’의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소금을 침과 서로 화목하게 됨은 앞서 ‘분리’를 원했던 제자들과 다르게, 하나됨을 상정하는 요소로 사용될 것이다.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은 분리되고 ‘제거’ 되어야 한다. 오로지 순전한 상태의 소금만이 그 기능을 사용하여 정결과 청결함, 소독과 맛을 냄 등에 온전히 사용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스스로 스캔들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 하지 못하고 맛잃은 소금이 되어 불순물로 가득한 상태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여전히 손과 발과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순물로 가득한 상태에 놓여져있다면 버림받을수밖에 없고 폐기물이 되어 게헨나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우리의 삶이 순전한 상태를 회복한다면, 이제는 ‘화목함’으로 하나됨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 그 자체로 예배의 요소로써 사용될 것이다. 그런 순전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