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가까이 가신다. 성전에서 벌어질 성전 정화 사건과 무화가 저주의 사건은 긴밀하게 엮여있다. 무화과 이야기로 시작한 본문은 무화과 이야기로 끝맺음 될 것이고 이 두 이야기는 ‘기도’라는 주제로 묶여있다.
예수님은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사실에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마가는 이 때가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다는 해설을 덧붙인다. 따라서 예수님은 원래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해설이 제시되지만 유월절 시기에 잎들이 나무에서 나올 때 이미 작은 설익은 무화과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먹을 수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따라서 설익었을지라도 먹을 수 있는 그 열매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저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직 설익었을지라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조차도 찾을 수가 없다. 잎만 가득한 무화과는 성전의 ‘기능’만 남아있는 상태와 연결될 것이다. 이로써 성전이 당하게 될 심판을 예상하게 만든다.
15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6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사실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 기준을 통과한 동물의 거래가 방문하는 예배자들에게는 필수적이었다. 그 모든 제물들을 끌고와서 예배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제물의 상태가 다치거나 병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준비된 예물을 사고 파는 행위는 허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성전세를 지불하기 위해서도 동전을 바꾸는 통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위는 ‘매우 과격’하고 급진적인 분노 아니냐고 질문이 들 수 있다. 그렇게까지 모든 상들을 뒤집어 엎고 쫓아버려야만 했냐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굳이 ‘성전 뜰’에서 사고 팔아야만 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들이 성전 밖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능을 무엇을 위해서 성전 뜰 안까지 가지고 들어왔느냐는 질문이 생긴다. 마가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가로질러 다니시며 물건 나르는 것을 금하신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 혼자’ 시라는 것이다. 그 넓고 큰 공간에서 어떻게 혼자서 이 일을 하고 계시는가? 이런일이 과연 가능한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채찍을 사용해서 장사꾼들을 몰아냈다고 묘사함으로써 이 행위가 매우 충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의 ‘기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안에 어떤 예배의 열매가 없었던 것이 그들로하여금 기대와 전혀 다른 것, 무성한 잎사귀같은 행위만이 성전 뜰을 채우게 만들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17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18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이 ‘기도하는 집’으로 불릴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런데 이들은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충격적인 용어로 ‘강도’라는 말을 사용하신다. 예레미야 7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성전이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온갖 악들이 벌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의 문맥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훔치고 빼앗고 살인과 간음과 우상숭배를 향해 빠르게 나갔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 성전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려고 시도한다. 그 행위를 명백하게 심판하셨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라고 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 그곳에서 벌어졌을 공공연한 폭리와 이권, 다툼들이 예배자들의 예배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런 성전의 비정상적인 상태, 기대되는 열매조차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상태를 지적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는다.
19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21 그래서 베드로가 전날 일이 생각나서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어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을 발견한다. 베드로는 관찰한 내용을 그대로 예수님께 보고한다. 여기에서 ‘랍비’라는 표현이 역설적이게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표현과는 다르게 가르침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 따라서 랍비가 원초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리라고 기대되지는 않는다. 베드로의 말은 이전에 변화산에서도 그랬듯이 ‘당혹감’이 담겨있는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이야기의 주제가 긴급하게 ‘기도’와 ‘믿음’, ‘응답’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의 장면과 함께 연결해서 생각해본다면, 온갖 부조리와 더러움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열매맺지 못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는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런 욕망과 탐욕의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무리 겉으로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결코 열매 맺을 수 없으며 뿌리째 말라버리는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형식’의 문제보다 ‘내용’에서 진실함이 뒷받침되어야함이 25절에서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먼저 용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한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이 산’은 무엇을 보고 말씀하신 것일까 생각할 때, ‘성전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산이 번쩍 들려 바다에 빠지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 대한 심판 예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불가능한 일이 참된 ‘믿음’에 근거해서 일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고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리가 점검해야 하는 것은 기도의 ‘형식’이나 ‘양’이나 ‘장소’나 ‘시간’일 수 없다. 때로 우리는 그런 것에 너무 많이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등등은 매우 좋은 기도의 예시 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도의 예시들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이 ‘믿음’에서 떨어져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동떨어져있으며, 마땅히 기대되는 열매인 사랑과 용서와 환대가 없다면 결코 응답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뿌리째 말라 폐기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 나라와 영광이 근거된 참된 기도가 우리 안에 되살아나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