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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고통의 원인, 관계의 단절 / 욥 19:1-29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욥이 대답하였다.
2 네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어느 때까지 말로써 나를 산산조각 내려느냐?
3 너희가 나를 모욕한 것이 이미 수십 번이거늘, 그렇게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럽지도 않으냐?
4 참으로 내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문제일 뿐이고, 너희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5 너희 생각에는 너희가 나보다 더 낫겠고, 내가 겪는 이 모든 고난도 내가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겠지.
욥은 다시금 빌닷의 모욕에 대답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욥을 모욕하고 학대한다. 그들에게서 친구들이 보여야할 헤세드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알고있는 진리에 대한 주장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욥을 향해 던지고있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에 대해서 그런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죄에 대해서 정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 정죄를 함부로 친구들이 할 수는 없다. 욥이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으로부터만 받길 원한다는 점에서 친구들의 정죄는 욥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위로’를 제공하는 것으로 포장했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장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월권을 행한 것이다.
6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7 “폭력이다!” 하고 부르짖어도 듣는 이가 없다. “살려 달라!” 고 부르짖어도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다.
8 하나님이, 내가 가는 길을 높은 담으로 막으시니, 내가 지나갈 수가 없다. 내 가는 길을 어둠으로 가로막으신다.
9 내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겨 가셨다.
10 내 온몸을 두들겨 패시니, 이젠 내게 희망도 없다. 나무 뿌리를 뽑듯이, 내 희망을 뿌리째 뽑아 버리셨다.
욥이 당하는 모든 환란과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하나님이 궁지로 몰아넣으시고 그물로 덮어씌우시니 도망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마치 욥을 악의 괴물을 잡듯이 몰아가신다.
이로써 경험하는 고통의 묘사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철저한 고립이다. 어떤 부르짖음도 응답받지 못하고 모든 길들도 어두움으로 휩싸여있다. 이어지는 묘사는 면류관이 벗겨지고 온 몸이 두들겨맞는 것이다.
우리는 욥이 당하는 고통이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지적했었고, 의인이 당하는 고통을 모두 당하신 예수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묵상했었다. 오늘 욥이 당하는 고통의 묘사들이 곧바로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하는것은 아니지만 그 그림자를 보여준다는데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불같이 노하셔서, 나를 적으로 여기시고,
12 나를 치시려고 군대를 보내시니 그 군대는 나를 치려고 길을 닦고, 내 집을 포위하였다.
13 그가 내 가족을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하시니, 나를 아는 이들마다,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
14 친척들도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구들도 나를 잊었다.
15 내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와 내 여종들까지도 나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니, 그들의 눈에,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욥이 묘사하는 고통은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으로 강조된다. 모든 관계성들이 파괴된 인간의 고립감은 누구도 억울함을 해소해줄 수 없고 그로인해 아무런 희망과 소망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참하다.
우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고통의 묘사들이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적으로 돌리신 인생이 ‘군대’를 보내시고 집을 포위하는 것같다고 묘사한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군대에 의해 잡히셨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가족들의 외면과 경멸 또한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하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미친 것’처럼 여겼다. 가까운 친구들이 잊고 버리는 것은 제자들의 배신을, 내 집에 머무는 나그네와 여종들이 낯선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주님의 집인 성전에서 벌어진 ‘외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16 종을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니, 내가 그에게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고,
17 아내조차 내가 살아 숨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
18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
19 친한 친구도 모두 나를 꺼리며, 내가 사랑하던 이들도 내게서 등을 돌린다.
20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21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22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
가장 가까운 관계성의 외면에서부터 모든 외부의 관계성이 망가지고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파괴되는 관계성은 피골이 상접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로 만들어버린다.
욥은 ‘죽음’을 묘사할 때 ‘비인격적’ 소멸로 묘사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죽음이 일으키는 작용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는데 관계성의 파멸이 빈곤과 육체적 고통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은 꽤나 인상적이다. 결국 욥의 전방위적이고 전인격적인 단절이 고통의 시작이고 절정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 그 전방위적인 단절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그분의 고통의 시작은 영원하신 왕께서 이 땅에 단절을 경험하시기 위해 아기로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가장 비참한 죽음, 최악의 단절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육체적 고통과 함께 결합된다.
23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24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욥의 호소는 확신으로 점점 분명해진다. 구원자가 살아계시고,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이 구원자의 등장에 달려있다. 그가 유일한 관계의 희망이다. 욥은 중보자를 ‘소망’ 했지만 ‘존재’를 의심했었다. 그러나 하늘의 중보자의 필요성은 점차 ‘확신’으로 나아갔다. 이 ‘확신’은 더욱 간절하고 선명한 실존을 바라본다. 욥은 자신의 삶의 문제의 해결은 오로지 이 구원자, 중보자의 등장에서만 해결된다.
26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27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28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내게 고통을 줄 궁리만 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칠 구실만 찾고 있다.
29 그러나 이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해야 한다. 칼은 바로 죄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분노다. 너희는, 심판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욥의 간절한 소망은 이제 더욱 발전한다. 그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의미 없는 것으로 존재의 소멸처럼 여겼던 것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 욥은 하나님을 죽음 너머에서 뵐 수 있는것처럼 여긴다.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옳은 진리는 가졌으나 진실을 왜곡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대리자인것처럼 월권을 행사했다. 그에대한 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욥의 극한의 단절의 경험과 육체적, 심리적 고통, 사회적 평가 추락, 극심한 인격모독,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등이 종합되어 최악의 인간고통을 전인격적으로 당하고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살펴봤다.
물론 욥기의 저작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욥기는 참된 ‘지혜’를 소유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고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붙들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사실을 읽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 지점이 원래의 목적에서 파생되어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만드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모든 순간에 경험하신 모든 고통 중에도 아버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붙들며 씨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조차 외면 받을 때에도 아버지를 부르짖으셨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깊이와 크기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아시기에 어떤 아픔이라도 예수님을 통과할때 ‘호소력’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늘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 주님께 아뢰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싸매어 주시길 호소하자. 진실과 진리이신 예수님 위에 참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구하자. 주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녀의 관계가 회복될 때 참된 위로와 소망이 임할 줄 믿는다.
묵상 포인트
1.
고통은 관계의 단절에서 시작되고 증폭된다.
2.
하나님과의 단절, 가족과 단절, 이웃의 단절, 사회적 단절 등 전인격적 단절이 비참한 인간의 전형이다.
3.
모든 단절을 경험하신 예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4.
따라서 예수님을 통한 호소가 효력있다.
5.
예수님을 통한 관계의 회복, 하나님께 올릴 호소의 정당성을 찾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