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21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다시 예수님의 식사가 주목된다. 이제 예수님과 일행은 ‘음식’조차 먹을 겨를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식탁이 얼마나 풍성한가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식탁이 음식 먹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긍정적인 신호인가, 부정적 신호인가? 이 열렬히 예수님을 따르는 팬덤이 나중에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아보인다.
예수님의 가족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기 위해 나섰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이 왕가의 방계 일족이었고, 매우 정결한 율법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집안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안식일을 범하고 부정한자들을 만지며 죄인들과 식사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도 덧붙여진다. 예수님이 바알세불 들렸다고,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이들의 판단은 귀신이 들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일을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놓고,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25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예수님은 사역의 결과를 놓고 논증하신다. 지금 귀신들과 질병들을 쫓아내시고 치료하시는 것이 과연 ‘악’의 힘으로 가능한가 질문하신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갈등하는 관계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나라, 가정, 자신 스스로. 좁아져오는 관계성 속에서 ‘갈라져서 싸우면’ 결코 버틸 수 없다. 그렇다면 악을 근거로 싸운다면 악의 세계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이 되고 마는데 어떻게 이 사역들이 악을 근거로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논증’이지만, 반대로하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침이기도하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편에서 일하고있는 중이라면, 그들은 스스로 갈라져서 싸우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힘센 사람을 묶어 놓고 세간을 털어간다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강력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묶어놓는 것이 지금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악의 나라’의 주민들이라는 말이 되고만다. 그들의 모순이 들통났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많은 논쟁을 낳았다.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될만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30절은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예수님이 ‘악한 귀신이 들렸다’라고 말한 이유 때문이라고 밝히고있다. 다른 논쟁적 부분들을 제외하고 본문에 의해서만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고, 외딴 곳에서 늘 언제나 ‘기도’하심으로써 ‘성령님’과 교제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 전반은 ‘성령’님에 이끌려 하신 사역이지 단독적인 사역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을 ‘악한 귀신’이 들려서 한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 영원한 죄에 매인다는 말은 ‘용서’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이 점이 의아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사역’을 염두해 두신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 십자가 사역을 마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 취급한다면, 더 이상 회복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32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4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온다. 우리는 오늘 본문 처음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귀신 들린 줄’로 알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예수님을 향한 오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예수님은 단호하시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은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조차도 허락될 수 없다. 예수님은 가족 구성원을 더욱 확장적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부하면 혈연관계라도 결국 전혀 다른 결과 속에서 영원히 다른 위치에 서게 될 것이기다. 매우 두렵지만, 예수님은 그 사실을 지적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계속된 오해와 잘못된 평가들을 살펴봤다.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거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욕하고 저주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 이 장면 어디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메시야 비밀로써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영광스러운 사역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아직 무지속에서 반응하고 있다. 참된 지식이 없는 채로 그들은 열광하고 또 저주한다. 그러나 마지막 비밀이 완전히 열린 후에는 더이상 핑계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든지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비난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들을 우리가 덩달아 적대적으로 맞서 싸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영광스러운 일과 섭리를 제대로 알릴, 그분의 일하심을 예수님처럼 직접 증명할 삶이 필요하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증거되며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증거들로 우리 주님을 자랑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