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2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매를 맞을 사람이면, 재판관은 그를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매를 때리게 해야 합니다.
3 그러나 매를 마흔 대가 넘도록 때려서는 안 됩니다. 마흔이 넘도록 때려서, 당신들의 겨레가 당신들 앞에서 천히 여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사람들 사이에 개인적인 분쟁이 생길 경우를 상정한다. 개인적인 분쟁에 대해서 ‘재판장’이 재판을 하는 경우는 이에 대한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증인은 두 세사람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판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왜곡’되게 이뤄져서는 안된다는 이전의 율법들이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봐야한다. 정의로운 판결은 왜곡되지 않고 옳은 사람에게 무죄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유죄선언을 받은 사람도 형벌은 받되 40대 이상을 맞는 일이 없어야 한다. 40대는 ‘기준’이 되어서 이후에 사도 바울도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도록 하며 과잉처벌이 없도록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과도한 태형은 이스라엘 백성을 천하게 여김을 받게 만들면 안된다. 다시말해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최고의 존엄이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4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십시오.”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되는 것과 가난한 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수확물에 의존해야 하는 주변인들의 권리는 연결되어 있다. 언약 사회의 전체성은 사람과 동물을 다 아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주적이다. 모든 피조물들을 관리하신다.
5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아내는 딴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합니다. 남편의 형제 한 사람이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6 그래서 그 여자가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7 그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경우에, 홀로 남은 그 형제의 아내는 성문 위의 회관에 있는 장로들에게 가서 ‘남편의 형제가 자기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잇기를 바라지 않으며, 남편의 형제의 의무도 나에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8 그러면 그 성읍의 장로들이 그를 불러다가 권면하십시오. 그래도 듣지 않고, 그 여자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면,
9 홀로 남은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기를 ‘제 형제의 가문 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하십시오.
10 그 다음부터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신 벗긴 자의 집안’ 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것처럼 과부들에 대한 보호조치가 세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의 아내가 이 가정 안에 머무르는 것도 ‘보호’의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형제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죽은 형제를 보호하는 조치가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유산’의 관점에서 합법적인 지위와 절차를 통해서 이름을 세워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상속권을 거절한다면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해야 한다.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데, 만약 형제의 아내와 결혼에서 유일한 아들이 태어난다면 자신이 생애를 걸쳐 노력해서 모은 재산이 사망한 형제의 아들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예시를 룻기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재산이 룻의 가족 정확히는 나오미의 집안에 상속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상상하기 힘들정도의 관대함이다. 그런 보아스의 관대함을 통해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이 명령은 약자와 소외자들을 위한 법과 잊혀진 자들에 대한 관대함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예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11 “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12 당신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자르십시오.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두 남성의 싸움에 아내가 참전하여 자신의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급소를 움켜쥐는 경우에 여인의 ‘손’을 잘라야 한다. 생식기는 수치심을 가져오게 만드는 신체 부위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런 의미라면 ‘손을 자르는 형벌’이 너무 과도하다고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생식기가 할례의 언약적 표징을 감당한다는 점, 생명을 탄생시켜 언약 백성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생식기의 손상은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타격을 입혔다는 점에서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형벌에 대한 내용은 단지 ‘상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언약]과 관련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3 당신들은 주머니에 크고 작은 다른 저울추를 두 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14 당신들의 집에 크고 작은 다른 되가 두 개 있어서도 안 됩니다.
15 당신들은 바르고 확실한 저울추와 바르고 확실한 되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오래 살 것입니다.
16 틀리는 추와 되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저울추는 표준 계량 도구가 아니라 부정직하게 이득을 얻기위해 조작된 것이다. 다른 계량 기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고 정직하게 매매행위를 해야 한다. 상거래에서 정직함은 땅에서 오래 살 것을 약속받는다. 반면에 거짓말로 왜곡함으로 매매행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위로써 죄의 목록들은 우상숭배, 동성애, 이방 제의에 참여하는 것 등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거짓말로 비정상적인 수익을 만들어 내는 행위는 ‘탐욕’이라는 거짓 신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며 그 탐욕과 욕망에 따른 거짓 매매 행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이전의 본문에서 살펴본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과 보호조치를 면밀하게 제공하셨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탐욕적인 부정직한 상거래는 이런 모든 하나님의 보호조치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17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 사람이 당신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십시오.
18 그들은 당신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19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유산으로 주셔서 당신들로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 사방의 적들을 물리치셔서 당신들로 안식을 누리게 하실 때에, 당신들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 사람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말렉은 가장 취약한 존재였던 출애굽 직후의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하나님은 아말렉이 했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약속의 땅에서 사방의 적들이 물리쳐졌을 때, 아말렉 사람들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은 아말렉의 범죄를 ‘기억하면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려야 한다. 이전의 본문들이 사회적 약자들과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과 보호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조해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아말렉에 대한 명령은 국가적으로도 취약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관심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연결시켜볼 수 있다. 반대로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삶에서 약자들을 학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거대한 민족적 이야기와 개인적 이야기 모두에서 ‘약자’를 향한 관심과 환대와 베풂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열매맺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거시적 이야기인 이스라엘의 세계관은 그들의 삶의 체계 자체를 세밀하게 구성해내고 조율해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읽고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이야기가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삶의 태도를 구성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칼빈주의를 삶의 체계로 구성해내야 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씀이 우리 삶의 체계로 구성되기 위해서 말씀의 깊은 이해와 그 원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 적용되고 실천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고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