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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결과보다 과정 / 욥 21:1-16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욥이 대답하였다.
2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
3 내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조롱하려면, 내 말이 다 끝난 다음에나 해라.
욥의 단절된 관계에서오는 비참함은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었다. 욥은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위로할 생각이면 욥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한다. 차라리 속에 있는 말들을 다 쏟아낸 후에 조롱하라고 말한다. 욥은 억울하다. 그 모든 억울함의 호소를 아무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전의 본문에서 살펴봤던 ‘하늘의 중보자’만이 이 호소를 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호소마저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4 내가 겨우 썩어질 육신을 두고 논쟁이나 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데에는, 그럴 이유가 있다.
5 내 곤경을 좀 보아라.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가 막혀 손으로 입을 막고 말 것이다.
6 내게 일어난 일은 기억에 떠올리기만 해도 떨리고, 몸에 소름이 끼친다.
욥은 자신의 육신에 집중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논쟁꺼리가 아니다. 욥이 초조해하는 이유는 중보자를 만나기도 전에 모든 억울함이 해소되지도 않은채 죽음이 임박하는 것이다. 욥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말한 것을 읽었었지만 여전히 그 시대의 관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이며 소멸의 세계 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초조함은 죽음 이전에 부디 중보자가 드러나시는 것이다.
욥의 곤경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재앙들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비참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이 고통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 친구들과 가족들과 모든 관계들이 깨져버리는 것, 이 모든 재앙들이 ‘곤경’이다. 누가 이 곤경에서 꺼내줄 수 있는가?
7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8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9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10 그들의 수소는 틀림없이 새끼를 배게 하며, 암소는 새끼를 밸 때마다 잘도 낳는다.
11 어린 자식들은, 바깥에다가 풀어 놓으면, 양 떼처럼 뛰논다.
12 소구와 거문고에 맞춰서 목청을 돋우며, 피리 소리에 어울려서 흥겨워하는구나.
이제 욥은 친구들의 비난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악한 자들이 잘 살고 번영을 누리는 일들이 실재로 벌어진다. 친구들은 그들이 반드시 파멸할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재로는 악인들이 잘 살고 자손을 보고 성장하는 것까지 볼정도로 장수한다. 재난도 없고 평화가 깃들고 하나님도 채찍으로 징계하지 않으시며 재산이 불어나고 자식들도 행복한 목가적인 분위기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한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풍성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 모든 악인들의 삶의 모양은 분명히 ‘경험적 지혜’다. 친구들은 옛날 사람들, 전통, 심지어는 천상적 말을 참칭하면서까지 악인들이 패망할 것이라는 [원론적 지혜]를 말한다면 욥은 철저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사건들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이 [현실적 지혜]는 경험적으로 우리 모두가 동의할만한 것들이다. 그런일들이 왜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인들의 평안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며 진실이다.
13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
14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15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
16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악인들은 고통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간섭하지 말라고 불평한다. 이것으로써 악인들의 삶의 모양은 하나님이 왕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된 인생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도 없이 그저 이렇게 평안하게 살고 죽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경배도, 기도도 필요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들의 성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욥을 악인들과 동기화 시키려던 친구들의 이야기에 전적인 반론이다. 욥의 친구들은 일어난 현상에서 욥을 악인으로 취급하고 온갖 수사들을 붙여서 욥을 모욕하지만 욥은 그들의 시도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결론만 가지고 ‘악인’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세계관’이야말로 그들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욥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인생은 아무리 잘나가고 평안하더라도 ‘악’하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자신이 주인된 인생이 성공했다고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악한 결과를 가진 사람은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친구들의 논지를 뒤집어 선한 결과를 가진 사람도 ‘죄인’일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만 좋으면 다 된다는 인식이 얼마나 팽배한 사회를 살고 있는가?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은 ‘결과’우선적 태도를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의 모든 연약한 실패들조차 하나님께 모든 우선순위를 맞추고 하나님이 주인되신 삶을 살려고 하는 삶을 긍정한다. 그런 삶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신원하실 것이다.
우리의 ‘과정의 선함’이 온전히 이뤄지길 소망한다. 결과주의적 태도보다 과정에서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게 될 줄 믿는다.
묵상 포인트
1.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악인의 결말이 늘 비참한것은 아니다.
2.
결과 우선주의적 평가는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3.
우리의 최종적 결과는 오로지 예수님께 달려있다.
4.
따라서 그 결과를 향한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