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4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제의 본문에서 성전이 파괴될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예언하시는 장면을 읽었다. 이제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계시며 이 성전에 대한 심판이 일어날 마지막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핵심제자들로써 예수미의 가장 은밀하고 비밀한 이야기를 공유할만한 지위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최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묘사하는 다양한 심판의 메시지들은 두려움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징조를 질문함으로써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밝혀지는 것은 ‘제자들’은 이 마지막 때에 ‘핍박과 환란’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은 더욱 각오를 다잡고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밖에 없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7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의 예시는 정말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로마와의 전쟁과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동안에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공포와 두려움을 먹고 자생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런 잘못된 정보에 쉽게 빨려들어가지 않으려면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욱 치밀하게 속이려드는 거짓말들에 속아 넘어갈 수 없다.
이런 일들이 역사 안에서 매우 빈번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험들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전쟁의 소문, 민족과 나라가 맞서 싸우며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드는 모든 상황들은 결코 특정한 시간대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소문들이 들려도 ‘아직 끝은 아니다’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신다.
따라서 제자들은 아무리 혹독하고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속지 않아야 한다’ 현실적인 위기와 공포는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서 사고가 불가능하게 만듦으로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게’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경고는 이 모든 공포스러운 상황들도 겨우 ‘시작’일 뿐이고, 끝이 될 수 없다. 끝날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끝이 올때까지 최선을 다해 증인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가 회당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게 되고, 그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0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예고는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될 것이고 매를 맞을 것이며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또 그들에게 복음을 ‘증언’ 할 증인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스스로 조심하라’ 라는 말은 매우 개인적이고 실재적인 경고가 될 수 있다. 누구라도 이런 일들이 닥칠 수 있다. 경고는 박해를 피하라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해를 신실하게 인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10절의 말씀이 종말적 조건이 되어서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함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여러 단체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몇가지의 문제점만을 지적하면,
1.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이다.
2.
우리는 이 구절 어디에도 ‘민족’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민족을 구성하는지, 민족의 정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3.
어떤 단계에서 특정한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을 최소한 성전이 무너지기 전, 사도 바울과 동역하던 마가만 하더라도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모든 나라가 복음을 들은 것은 아닐지라도 ‘국제적인 하나님의 사람들’ 경험하고 있었고 당시의 한계 내에서는 얼마든지 ‘성취된 일’로 인식할 수 있었다.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너희는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지 그 시각에 말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12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13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재판의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까’ 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과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말씀이 연결되어 박해를 당하는 제자들이 해야 할 말은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 시며, ‘구원자’ 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갈등을 촉발시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형제와 부모자식의 관계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다. 이 갈등은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한 [증오]에서 시작된다. 이 증오를 이겨내야한다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만 ‘인내해야 한다.; 이 인내의 열매는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구원’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박해에 대한 각오와 열매 없음에 대한 좌절스러움에도 해야할 일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한편으로는 인생의 실패자요 루저라고 부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 이 종말의 예고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삶’이 궁극적으로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일은 이미 예고 되었다. 따라서 어떤 환경적인 위기와 어려움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복음을 위하는 삶, 증인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박해와 위기와 슬픔 속에서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점’과 박해 끝에 ‘구원’이란 놀라운 선물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오늘도 그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