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이 다시 비유를 써서 말을 하였다.
2 지나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던 그 지나간 날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3 그 때에는 하나님이 그 등불로 내 머리 위를 비추어 주셨고, 빛으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내가 어둠 속을 활보하지 않았던가?
4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5 그 때에는 전능하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자녀들도 나와 함께 있었건만.
6 젖소와 양들이 젖을 많이 내어서, 내 발이 젖으로 흠뻑 젖었건만. 돌짝 밭에서 자란 올리브 나무에서는, 올리브 기름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건만.
욥은 고통 이전의 시기에 얻었던 번영과 명성을 추억한다. 그때 친밀했던 하나님과의 관계, 풍요로운 삶, 자녀들의 존재 등, 전인격적으로 욥이 받았던 복으로 충만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재구성하는 이유는 앞으로 자신의 공식적인 고발장을 쓰기 위한 근거의 마련이 될 것이다. 욥은 잘못한 것이 없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서 부족함없이 살기 위해 노력했고 열매가 있었고 그에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주신 결과물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고통을 주신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했던 관계가 깨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셔야 한다. 그 이야기를 위한 전초전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충실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7 그 때에는 내가 성문 회관에 나가거나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8 젊은이들은 나를 보고 비켜 서고, 노인들은 일어나서 내게 인사하였건만.
9 원로들도 하던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10 귀족들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나 한 것처럼 말소리를 죽였건만.
성문 앞, 광장에 자리를 앉는다는 표현은 그 성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의 관리자 역할을 의미할 수 있다. 노인들과 원로들, 귀족들마저도 욥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추는 것은 매우 존중을 받는 위인으로, 존경과 칭찬이 자자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발언에는 힘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으므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욥은 그 힘을 결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의롭게 사용하는데 힘을 쏟았다.
11 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칭찬하고,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기꺼이 자랑하고 다녔다.
12 내게 도움을 청한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 주었는지,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를 내가 어떻게 잘 보살펴 주었는지를 자랑하고 다녔다.
13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내가 베푼 자선을 기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과부들의 마음도 즐겁게 해주었다.
14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15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16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17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
욥은 자신이 발언의 힘이 실릴수밖에 없었던 삶의 실력을 약자들을 보호했던 삶을 근거로 든다. 욥은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을 보살펴 준 것을 자랑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놓치지 않았다.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고 눈 먼 자에게 눈을, 걷지 못하는 이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악인들에게 보응하며 희생자들을 보호하는일에 앞장섰다.
이전에 엘리바스는 욥이 고아와 과부를 억압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중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말이 틀렸음이 입증된다. 욥은 오히려 고아와 과부를 있는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사명선언을 하시며 가난한자들에게,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하시는 장면처럼 욥의 사명이 그러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의 발언은 힘을 가질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 그래서 나는 늘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건장하게 살 것이다. 소털처럼 많은 나날 불사조처럼 오래 살 것이다.
19 나는,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와 같고, 이슬을 머금은 나무와 같다.
20 사람마다 늘 나를 칭찬하고, 내 정력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건만.
21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내 말을 듣고, 내 의견을 들으려고 잠잠히 기다렸다.
22 내가 말을 마치면 다시 뒷말이 없고, 내 말은 그들 위에 이슬처럼 젖어들었다.
23 사람들은 내 말을 기다리기를 단비를 기다리듯 하고, 농부가 봄비를 기뻐하듯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24 내가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새로운 확신을 얻고,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25 나는 마치 군대를 거느린 왕처럼,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사람처럼,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이 갈 길을 정해 주곤 하였건만.
욥은 자신의 인생이 매우 만족스러운 마지막으로 맺어질 것을 기대한다. 장수의 복과 건강의 복을 얻을 것을 기대했고 사회적 업적과 평판이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더욱 커다란 열매로 되돌아 올것을 기대한다. 마치 시편 1편의 복있는 사람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을 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은 군대를 거느린 왕처럼, 위로자로써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길을 정해주는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긍정적인 행보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 욥의 기대는 완전히 틀어졌다. 그가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이뤄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의롭게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모든 것들이 허사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건장하지도, 칭찬을 받고 있지도 않다. 자신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 하는 말들은 모두다 가로막힌다. 욥을 보면서 용기를 얻기는 커녕 좌절과 절망만을 느낀다. 왕이 아닌 비참한 종의 모습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아니라 뽑혀져 말라버린 나무로 불에 던져질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만 지속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모든 것이 원하는대로 굴러가는 그런 인생말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공상일 뿐이다. 우리 인생은 늘 언제나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선한 일들을 했는데 그것이 무조건 좋은 결과물로 나타나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동떨어져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안좋은 일이 닥쳐올 수도 있다. 그때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야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최종적 순간이다. 우리는 끔찍한 마지막을 맞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현실과 비참한 상황들조차도 마지막 최후의 역전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다시금 기쁨을 누리며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좋은 시절의 달콤한 위로보다 완전해질 미래의 소망이 우리를 더욱 위로하며 기쁨으로 인도해주기를 소망한다. 욥은 자신의 입장을 소명하기 위해서 좋은 날을 꺼내들었지만, 우리의 입장을 우리 주님께서 소명하실 것이기 때문에 미래를 소망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줄 믿는다. 더 좋은 것을 얻는 삶을 기대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선한 일의 결과가 늘 언제나 좋은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2.
그렇다고 비참한 결말이 선한 일들에 대한 최종적 결과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부활 너머에서만 모든 인생의 평가가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뤄질 것을 안다.
4.
따라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순전해야 한다.